삽질의 종착지 삼천포
한가하게 술 얘기나 쓰고 앉았다.
계엄 이후로 일이 딱 끊겼다. 회사는 말아먹기 딱 좋을 만큼 장사가 안된다. 내 일도 그만큼 줄었다. 앉아서 하는 일의 절반이 돈걱정이니 걱정하는 시간에 능률적으로 딴짓을 하자.
술 얘기를 어디서부터 풀어내면 좋을까.
통도사 자장매 소식을 들었다. 매화가 그렇게 촘촘히 아름답게 피었구나. 가슴이 두근거렸다. 시절이 뒤숭숭하든 말든 꽃은 꽃의 할 일을 한다. 계절이 뒤엉켜드는 위기의 순간에도 나무는 더디 가더라도 나무의 일을 해낸다. 꽃자리는 얼마나 환하고 환한 지. 사진으로 도착한 꽃소식, 차마 한 번에 바라보지 못하고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봤다. 사진으로도 이렇게 아까운데 거기서 꽃을 만나면 얼마나 울렁일까. 향은 또 얼마나 스며 올려나. 긴 겨울을 지나고 올해만큼 매화가 피기를 기다린 날이 또 있을까. 매년 그때의 나는 꽃을 기다렸겠지. 올해 유난히 매화 소식에 귀를 세우고 있다. 어딘가에 꽃이 핀다는 소식을 들으면 회사에서 한참 길 건너 매실농원의 언덕을 바라다본다. 홍매화가 유난히 도드라지게 많은 거기 언덕이 진분홍으로 붉다. 매화 얘기를 이렇게 주저리 주저리 하고 있으니 한참 전에 친구들을 불러모았던 일이 떠올랐다.
'언니들 기차 타고 매화 보러 안 갈래요? 거기서 텀블러에 막걸리 마시자'
이 대책 없고 어이없고 하찮고 아름다운 계획에 손을 들어준 내 고마운 친구들.
매화가 언제쯤 피나 호시탐탐 내내 기다려 서울과 경기도에서 친구들이 부산으로 내려왔다. 손바닥만 한 우리 집에 다 같이 모여 와글와글 잠을 자고 뒷날 아침 기차를 타고 원동 순매원을 갔다. 부산서 원동까지 길지도 짧지도 않은 그 거리에 낙동강을 건너고 여행처럼 와글와글 설레던 우리들.
마트에서 산 텀블러와 네임펜을 쥐어주고 야심 차게 기획한 행사명을 강제로 각자 쓰세요! 이게 뭐라고 이렇게 와글와글 신이 날까. 좀 더 전문적인 굿즈를 만들 수 있으면 얼마나 신날까. 친구들은 또 신나게 깔깔거리며 이름과 행사명을 쓴다. 그렇게 다 같이 똑같이 생긴 텀블러를 들고 무궁화는 원동역에 도착했다.
원래 학연 지연으로 알던 사이도 아니고 친구들은 sns에서 만났다. 스치고 지날 수도 있던 사람들이 서로 앞에 나선 글자들에 반해 글자 뒤 사람에게 앞 뒤 없이 빠져들었다고 할까. 일평생 마음이 너무 아픈데 아프다고 매일 소리 낼 수는 없으니 글자 뒤로 도망을 갔었다. 하염없이 가라앉는 내 말 사이의 간극을 알아봐 준 사람들. 그 틈을 비집고 들어선 빛 같은 사람들. 나는 정말 홀랑 반해서 서울로 수원으로 쫓아 댕기며 당신들과 마음을 나누었다. 찰떡같이 장단 맞춘 삽질과 매번 시작했다 하면 삼천포로 빠지며 오가는 대화 사이에 왈칵 쏟아지는 진심들이 그때를 지켜주는 빛이었다.
낙동강과 강변을 따라 달리는 기찻길을 내려다보는 언덕 위 매실농원은 봄날에 축제가 열린다. 듬성듬성 꽃나무 아래, 사이에 빨간 접이식 테이블이 깔리고 일회용 접시는 비닐봉지가 씌워지고 그 위에 정구지 땡초가 들어가는 찌짐 한 장씩. 그날 정구지찌짐은 한 장에 얼마였나. 막걸리는 또 어디 거였나.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데 조금 흐린 듯 아리송했던 날씨와 내가 쥐어준 텀블러에 따라 마시는 막걸리를 너무나 신나 하는 사람들이 예뻐서 나는 자꾸 흐뭇해졌다. 의자도 제대로 없던 비탈진 언덕에 엉거주춤 서서 매화 가지가 코로 어깨로 닿는 그 사이사이에 비스듬히 서서 막걸리를 홀짝홀짝. 행복이 달리 있을까.
꽃그늘 아래 모여들어 술을 마시듯 우리의 술자리는 돌림노래처럼 이어졌다. 노래가 이어지면 부르는 사람과 그날의 마음에 따라 같은 노래도 달리 들리는 마법처럼 우리는 같은 사람이 모여 술을 마시는데도 매번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시간을 쌓았다.
이제는 마음처럼 자주 만나지도 못하고 연락을 매일처럼 하지도 않는다. 많으면 일 년에 한두 번 세월을 이만큼 지나와 지극히 익숙하고 지극히 사랑하는 마음,
서로에게 여전히 같은 사람인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