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참는 어른이 된다는 것
한국 여성이 빅엿을 받아 들었던 25년 세계 여성의 날, 욱 해서 술은 주문했는데 은근 걱정이 된다. 술 마실 작정을 하고 유가네 닭갈비 기본찬으로 나오는 양배추를 일단 드레싱 없이 한껏 먹었다. 이런다고 술이 들어가고 혈당이 안 오르지 않겠지만 눈 가리고 아옹하는 것이 사람 된 도리 아니겠어?
당뇨가 왔다.
수면 패턴이 엉망이었다. 거의 박살이 났었다. 잠을 못 자니 몸이 여기저기 고장 났다. 2~30대는 잠을 못 자도 그럭저럭 버텨졌는데 앞자리가 4가 되니 몸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거 볼래? 하며 여기저기 아픈 곳을 전시했다. 전신마취 수술을 하고 몸은 회복이 더뎠다. 수술자리는 아무는데 전신마취 했던 몸이 패턴을 잃었다. 잠은 더 멀리 사라졌고 수면제를 처방받고서야 겨우 잠에 들 수 있었다. 꾸역꾸역 느리지만 괜찮아지는 줄 알았다. 건강검진 결과가 참혹했다. 안 그래도 널을 뛰던 혈당이 몸이 안 좋은 상태에서 잠을 못 잤더니 확정적으로 당뇨 선언을 했다. 잠만 좀 더 잘 잤더라면 괜찮지 않았을까 했지만 이미 늦었다. 어쩌겠어, 살아야지.
제일 먼저 술을 끊었다.
아니 개가 똥을 끊어? 니가? 어. 내가.
술 끊는 건 생각보다 너무 심플했다. 안 먹었고 먹고 싶지 않았고 생각도 안 났다. 진짜 신기할 정도로 아무렇지도 않게 술을 끊었다.
나는 술을 너무너무 사랑하는데? 어, 계속 사랑은 하는데 안 마셔.
이거 술이랑 먹으면 너무 맛있잖아? 어, 물이랑도 맛있네. 근데 이거 탄수 비율이 얼마야?
와 오늘 날씨 너무 술이다!! 어 진짜 완전 술이지!!! 물로 짠!!!
술자리에 앉아 말로 장단치고 술잔에 물을 마신다. 나 정말 내가 너무 신기한 게 있잖아 술을 앞에 두고도 별로 먹고 싶은 생각이 안 들었다. 혓바닥이 회색이 된 것 같은 시점에 술은 문제가 아니었다. 하긴 그 정도 마셨으면 남들 평생 마실 만큼은 마셨나 보다 하고 웃어넘기는데 진짜 그런 것 같다. 술값으로 써재낀 돈을 아꼈으면 아파트 한 채는 남았고 몸에 병도 안 들었을까 생각을 해보지만 이미 지나간 술이고, 벌써 도착한 당화혈색소 10.5 일 뿐. 평생 처음으로 살고 싶었다.
밥, 빵, 면, 떡, 술을 끊고 운동을 하고 마음 속 지옥도 온갖 부침을 내려두고 체념하니 잘 수 있었다. 이 지경이 되어야 그냥 잘 수 있구나 그렇게 그럭저럭 몇 달 만에 당화혈색소 6.5로 내려오고 지금도 6.0으로 유지 중이다. 사실은 5점대로 내려갔었는데 느슨해진 식이로 약간 수치가 올랐다. 선생님이 이 정도면 아주 훌륭하다고 이렇게만 유지하자고 하셨다. 그렇다고 느슨해지면 안 되는데 알아~ 그래 안다고.
겨울이 길었다. 한 계절 아무것도 못할 정도로 무참했다. 내 일로 머리가 터지는데 하필 나라가 망할 지경이었다. 공공의 적이 나타나면 그쪽으로 집중 하면 된다. 사사로운 내 이야기는 그저 내 안에서 삭이는 거고 죽일 놈이 나타났으니 그쪽으로 분노를 투사하는 거다.
국회에서 탄핵안이 1차로 부결된 날, 그날 친구들과 오랜만에 소주를 마셨다. 밀린 얘기도 있었지만 일단은 공공의 적이 있어서 그게 먼저였다. 속이 부글부글하니 그래 오늘은 소주 한 잔 하자. 오랜만에 마시는 소주는 어쩜 그렇게 달고 단가. 세상이 이렇게 망할 듯이 어두운데 술맛이 이렇게 좋으면 안 되잖아. 꺾어 마시며 내려놓는 술잔이 너무 당연하게 익숙하다. 하긴 언제는 술이 쓰다고 안 먹었나. 쓰면 쓴 대로 세상이 이지경이니 술맛도 이지경이었지.
농담 삼아 분기에 맥주 한잔쯤은 괜찮잖아 했었다. 지난해 4/4 분기는 소주였고 올해 1/4 분기는 쏘맥이네.
분노는 힘이 강해 몸 안에 또아리친 한때 먹던 가락을 불러내는지 맥주 500cc 로도 어지럽던 몸-진짜다 안마시다 마시니 맥주 오백을 다 못마시겠더라니까? 개소리 하지마라 그러겠지만 개가 짖다가 멈추는 날이 올 줄 난들 알았겠냐고-이 소주는 천천히 마시니 괜찮더라.
병원 쌤이 보시면 아이고 하시겠지만, 선생님 세상이 이렇게 절망스러운데 이렇게 조금 위로는 괜찮잖아요(아니요. 대답하지 마세요.) 과자로 입이 터진 한 계절을 보내며 술이 나쁠까 과자가 나쁠까 생각을 했다. 당화혈색소 5.9가 6.0이 되었다. 술을 계속 안 먹었으니 비교가 어렵다. 비교할 생각이 안 들어서 다행이다. 과자 플로우도 서서히 진정국면에 들어섰고 술이야 뭐 걱정할 정도는 이제 아니니까.
여성의 날 지하철을 내려 집까지 걸어오며 중간에 잠시 멈칫거렸다. 딱 한 잔만 더 할까? 속이 마르게 타고 밀려오는 생각이 발목을 잡았다. 집으로 가는 중간에는 너무너무 사랑하는 비바라초가 있다. 비바라초 골목에 들어설까 하다 발을 멈췄다.
하나,
둘,
셋, 하고도 ,,,,, 숨을 고른다.
한 잔 더하면 감정이 왈칵 밀려오겠지 그러면 실수 밖에 더 하겠어. 이젠 그건 안 해야 하는 나이니까. 비바라초에는 맛있는 생맥도, 와인도, 어디에도 찰떡같은 안주도 종류별로 기다리고 있지만 그다음 나를 차례로 기다리는 감정 순서를 생각하니 벌써 피곤했다. 그걸 감당할 자신이 없다. 지치고 무력한 나는 감정마저도 피곤한 40대가 되었다. 윤종신 노래 <끝무렵>이 자주 생각났다. 처절하게 그래 나도 '다왔나봐 끝이 보여...'
다행이다. 공공의 분노만으로도 지금은 차고 넘친다. 미친 흥은 글자로 내지른다. 술보다 이게 훨 괜찮잖아. 맨정신에도 술주정이 가능하다. 아 맨정신은 아니고 술기운이 조금 남은 상태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