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은 꼭 병으로 시키기
사람이 살면서 간절한 것 중에 하나가 동네에 혼자가도 어색하지 않은 단골술집 하나.
집 근처 국밥집 말고 혼자 가서 '좋다, 여기에 드러눕는다'하고 내적 친밀감을 가졌던 술집들은 이상하게 하나같이 다 망했다. 아... 진짜 집에서 혼자 마시긴 싫은데 술 한잔이 너무 간절한 날인데 결국 선택지가 신창국밥 섞어에 소주 반 병이라니. 그리고 좀 멀리 걸어봐야 소고기국밥에 소주냐고. 국밥에 소주가 나쁘다는 얘기가 아니다. 내가 새벽에 자다 깨 어슬렁 거리고 들어간 24시간 국밥집의 소중함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심지어 그 정서 몹시 사랑한다. 깍두기에 소주 반 잔 꺾어먹고 속이 싸해질 때 국물 한 숟가락. 그 맛을 어떻게 모르겠냐고. 근데 사람이 어떻게 맨날 소주만 먹냐. 국밥집에도 맥주 있다는 소리는 지나가세요. 목욕탕에서 나와 더운 속을 차가운 하이트 한 잔으로 일단 누르고 시작하는 낮술 맛도 안다고. 그거 말고 말이야, 기분에 따라 상쾌한 생맥이 땡기는 날도 있고, 와인 한 잔 마시고 싶은 날도 있는 거다. 그날의 온도 습도 어쩌고 그거 말이야.
인생 어쩜 이렇게 가혹하고 외롭냐 하며 빙글빙글 동네를 돌다 결국은 가까운 신창국밥에 가서 소주 한 병을 시켜 결국은 한 병을 다 먹고 나오는 딱 그 시점에 새로 공사하는 가게를 발견했다.
어째 내장 도색이 예사롭지 않다. 온통 주황색인데 그게 참 산뜻하니 예뻐서 호시탐탐 지켜봤다. 그래 저기는 아무래도 술집이다. 음... 바 자리를 만드네? 일단 다찌가 있으니 술집이겠고만. 일부러 잘 가지도 않던 동네 번화가를 누비며 그 가게가 간판 달기를 학수고대했다. 잘해야 일식 이자까야 일까 했는데 어머나 어쩜... 정말 어머나... 스페인 타파스래. 나 정말 가슴이 얼마나 두근거렸었는지 모른다. 생각만 해도 너무 좋았다. 증말이지 퇴근하고 신창국밥 말고도 갈만한 동네술집이 생기는 건가. 내 인생에도 이런 날이 오는 건가. 죄다 2인 이상만 가야 할 것 같은 동네 번화가에서 혼자 갔다 걸어서 집으로 돌아올 수 있는 동네술집이 생기는구나.
크!!!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온다.
드. 디. 어. 비바라초가 창 밖에 스페인국기를 내걸고 오픈했다. 그게 2019년인가 18년인가. 긴가민가. 여튼 코로나 전이다. 속으로 만세를 부르며 오바쌈바 난리가 났지만 아죠 그냥 한껏 무심한 척 비바라초에 들어섰다. 씩씩하게 혼자 술을 마시는 21세기 현대녀성은 어쩐지 좀 자연스럽고 쿨해 보이고 싶으니까. 처음, 바 자리에 앉아 차분히 메뉴판을 넘기고 혼자 마시기에 750미리 와인 한 병은 너무 많으니까 잔으로 시켰다. 그리고 그게 그러니까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안주가 너무 맛있잖아, 너무 제대로잖아, 이 동네에 이렇게 혼자 와인이라니 이 감격스러움이라니 한 껏 흥이 올라 잔으로 한 잔 한 잔 마시다 보니 제가 그러니까 하우스 와인으로 오픈한 한 병을 다 마셨네요??? 첫 방문에 진상 짓을 해버렸다. 아이고 사장님 죄송합니다. 첫눈에 반한 비바라초는 마음속 동네 1위로 등극했다. 짜잔.
술꾼에게 자랑스러운 동네 술집이 생겼다?
당연히 친구들을 불러야 한다. 메뉴판 정독을 시키고 메뉴 도장 깨기를 하는데 맛없는 메뉴가 1도 없고, 그 당시 시내 번화가도 아닌 동네 업장에서는 흔하지 않은 스페인 와인을 종류별로 적당한 가격에 마실 수 있는 가게라니 어떻게 자랑하지 않고 참겠는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약을 팔고 동네로 친구들을 불렀다.
대만족 대만족 대만족
혼자서도 가고, 친구랑도 가고, 친구들이랑도 가고. 첫날의 진상 짓을 반면교사로 삼고 그 뒤로는 혼자라도 꼭 한 병을 시켰다.
2019.12.7 김윤아 콘서트 날이었다. 낮에 인사 가야 하는 결혼식, 저녁에 콘서트였다. 연말답게 화려한 차림새는 이름이 인사가는 결혼식이라 그랬지만 이유가 어쨌든 화장하고 단장한 내가 스스로 나쁘지 않은 그런 날. 같이 콘서트를 본 친구를 배웅하고 혼자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운명처럼 버스가 딱 비바라초 앞에 선다. 어쩔 수 있나 한 잔 해야지. 윤아 언니가 <봄날은 간다>를 불렀다고. 인생 치트키를 언니가 내질렀는데 어떻게 맨 정신으로 그날을 보내겠습니까. 그때도 어지간히 부대끼고 있었다. 어쩌면 사는 일은 매번 이렇게 고달프지 하던 날들. 하루 빼꼼한 날이 없네 하던 그 때. 개소리나 하며 슬렁슬렁 사는 게 꿈인데 뭐가 이래 빼곡하게 아파. 지금도 하는 말 이번 생은 업인가. 그런가.
비바라초에는 연말이라 혼자 온 손님이 딱 둘이었다. 나 말고 여자 한 분. 우리는 서로 말 한마디 하지 않았지만 서로 존재만으로도 의지가 되었겠지. 당신도 나도 이 밤에 혼자 여기서 와인 잔을 빙그르 돌리며 공기가 와인에 닿기를, 한숨 쉬어 조금 더 향이 더해진 한 모금 차분히 마시며 각자의 시간을 지나고 있었겠지. 구두 안에서 발은 부어가고 술은 달고 향기롭고 쓰다.
코로나와 이런저런 사정들로 너무 오랜만에 갔더니 사장님이 나를 못 알아보셨다.
"아니 왜 이렇게 살이 빠지셨어요. 못 알아봤어요"
"몸이 좀 안 좋아서... 사장님도 너무 많이 빠지셨네요."
"저도 몸이 좀."
웃픈 안부를 전하며 마시던 와인 한 잔은 얼마나 달고 달았는지.
혼자 갈까 했던 날을 지나고 보니 자꾸 생각이 난다. 다음 분기에는 비바라초를 가자. 오랜만에 바 자리에 앉아 너무 맛있어서 머리끝이 쨍해지는 산뜻한 에스트렐라 생맥을 마시고 천천히 메뉴를 훑어봐야지. 그리고 계절이 넘어서는 그 날 오래오래 산책을 해야지. 마음에 멀리 약속하나 심어두고 오기도 전에 이미 지친 한 계절을 지나볼까. 봄이 지나고 나면 그래도 좀 나아지겠지.
멀찍이
그렇게 지나가면 여름에 닿겠지.
그렇게 지나가면 좀 더 무던해진 나를 만날까.
거기 너무 많은 이야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