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에 쌓인 엄마 얘기를 야금야금 까먹었다. 산소에 갔더니 이제는 거의 숲이 된 공원묘지에 까마귀 음복단이 조직적으로 활동 중인 얘기는 쓰지도 않았는데, 엄마의 마지막 날들이나 사춘기가 와서 엄마랑 싸웠던 얘기도 아직 안 썼는데 나는 좀 숨이 찬다. 엄마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다. 엄마가 어떤 사람인지 내 시야에 한정적으로 남은 엄마는 엄마의 얼마였을까. 그 얼마라도 매달리며 조각보를 이어가듯 이야기를 얼기설기 풀어내다 보니 오래 묵힌 그리움이 둔하게 왈칵, 치고 가는 날이 많다.
이걸 근근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기어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 나는 어쩌자고 더 잃어버리기 전에 기록을 하자고 맘을 먹었는지도 자꾸 까먹어요.
결국 내 감정만 주루룩 나열하고 있는 것 같아서 이게 옳은가 생각을 하는데 물어볼 엄마가 없잖아.
긴 편지를 쓰는 마음으로 그냥 버티고 있는 것 같아요.
온갖 기억을 끌어와 가만히 들여다보면 나보다 어렸을 엄마가 자꾸 생각나요.
아빠가 그렇게 주구장창 사고를 치는데 왜 기어이 참고 살았을까
이 막막함을 어떻게 살았을까
그리고 나는 엄마한테 어떤 딸이었을까
어려서는 우리 집이 가난한 줄 몰랐다. 어릴 때는 그런 게 눈에 안 보이니까. 국민학교 3학년 무렵, 처음 우리 집이 가난하구나 인식했었다. 가난이 내 잘못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엄마 잘못도 아니었다. 상황이 그랬을 뿐이고, 엄마는 나아지려고 열심히 살았다. 나도 남들처럼 피아노 학원 다니고 싶고, 근사한 전집도 갖고 싶었다. 다 가질 수는 없는데 내가 어려서 너무 뭘 몰랐다. 애들이 스스로 밥을 챙겨 먹을 수 있으니 엄마는 일하는 시간을 늘렸다. 내가 감당해야 할 일들이 자꾸 늘어만 갔다. 두 살 터울 남동생을 안 챙긴다고 혼이 나기도 했고, 설거지를 미뤄놨다고 혼이나기도 했다. 왜 동생만 그렇게 챙겨줘? 불만도 있었다. 나도 동생처럼 그러고 싶은데 왜 나는 항상 의젓해야 해?? 나랑 쟤랑 겨우 두 살 차이라고. 자잘하게 쌓인 불만은 한창 예민해진 그 무렵 보통의 아이들처럼 터졌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사춘기가 왔었다. 무슨 날이었더라 엄마가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냐고 했던 그날 엄마는 어떻게 버텼을까, 무던한 척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그래놓고 나는 엄마 생일을 까먹었는데 엄마는 마음이 어땠을까. 나중에 엄마 생일이 지난 걸 알고 너무 미안했다. 어쩌지... 하필 어쩌자고 왜 그랬을까 싶었다. 너무 미안했는데 모른척하고 엄마랑 데면데면하게 지냈다. 사실 아침이면 출근해서 집에 없는 엄마가 너무 다행이었다. 그냥 미안하다고 했으면 됐을 텐데 뭐가 그렇게 꼬여서 그랬을까. 엄마한테 그렇게 못 박는 소리를 왜 했었는지는 기억도 안 나는데. 지금 생각하면 아무 일도 아닌데 그냥 사과하지 그랬어 바보야. 뭐가 그렇게 불만이 컸을까. 아무리 답답해도 시간을 거슬러 나에게 일러줄 수 없다. 나는 다가올 미래도 모른다. 제대로 사과도 못하고 추석이 오고 그리고 얼마 뒤 엄마가 떠났다. 말도 없이. 인사도 없이.
엄마는 늦은 저녁 퇴근길에 가끔 전화를 했었다. 좀 내려올래?
그렇게 같이 손잡고 집으로 걸어오는 날에는 이런저런 얘기를 했었다. 엄마는 니가 스무 살이 되면 하는 이야기를 종종 했었다. 그건 매 번 달랐는데 같이 여행을 가기도 했고, 같이 맥주를 마시기도 했다. 그 얘기가 지루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동생도 아니고 나만, 나만 엄마를 독차지하는 순간이기도 했고, 엄마가 나를 어른처럼 대해주는 느낌이기도 했다. 나는 스무 살이 너무 먼 미래 같았고 엄마는 좀 외로웠었나 보다. 차마 속을 다 털어놓기에는 그래, 내가 너무 어리다. 다만 손잡고 걷는 상태로, 잡은 손에 전해오는 온기로 위안하며 그래 얼른 커라 니가 크면이었을까. 중학교도 못 갈 만큼 가난했던 집안 사정은 소녀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돈 벌러 나섰던 도시는 얼마나 낯설었을까. 그렇게 어떻게 어떻게 살아 자식을 낳아 걔가 교복을 입고 중학교를 가는 날 무슨 결심을 했을까.
엄마. 미안.
진짜 너무너무 미안했는데 소리 내서 미안하다고 말 못 해서 미안.
마음이 그런 건 아니었는데 되게 속이 상했었나 봐. 그래도 그러면 안 되는데.
잘못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