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빠를 많이 닮았다. 처음 본 사람도 아버지? 할 정도로 닮았다. 첫 딸은 아빠를 닮는다는데 하는 얘기에 예시로 나올만하다. 그러니 어딜 가든 조심스럽게 예의 바르게 행동하려고 애썼다. 내가 함부로 나대면 아버지가 욕을 먹는다. 그거만큼 모양 빠지는 게 어딨어.
드라마 작은 아씨들의 여주인공은 한 회사의 경리다. 그 경리인 인주를 돕는 화영언니도 경리다. 드라마는 그게 끝이 아니지만 사람들이 경리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되짚으며 부조리를 일깨운다. 내가 딱 그 경리니까. 영수증 정리를 하고 소소한 뒤처리를 하는 그런 경리. 내가 일을 시작하기 전 시절의 경리와 21세기 드라마 작은 아씨들이 나오는 지금에도 경리에 대한 인식은 크게 다르지 않다. 최저시급을 주고 적당히 어린 여자애들을 만만하게 갈아치우며 쓰고 버리는 그런 직종. '너 말고도 그 일 할 사람 많아' 하는 바로 그 경리.
대체로 전화를 받아도 -습니다, -입니다 하려고 했다. 만만해 보이는 것도 싫으니까. 말끝을 흐리지 않는 경리는 드물던 때라 딱딱거린다고 전화로 화를 내는 사람도 있었다. 경리주제에 사근사근해야지 땍땍거린다고. 그런데 어쩔? 차라리 의사전달이 명확한 게 낫지 않나? 그러던 사람들도 내가 사장 딸인걸 알면 조심스러워했다. 그래서 달라지게는 뭔데요. 비루한 인식은 종종 바닥까지 사람을 내쳤다. 감히 경리 주제에 했다가 아? 사장님 따님이셨어요? 하는 사이의 간극은 내가 사람이라기보다 도구나 물건에 가까운 기분이 들게 했다. 그래봐야 내가 하는 일은 같고, 받는 돈도 같은데 그 사이에 데굴데굴 굴려지다 뒷말들이 생겨나겠지.
어디였나 출장지에서 만난 분에게 '듣던 거랑 많이 다르시네요'라는 말을 들었다. 그전까지 한 번도 뵌 적 없는 분이었고 겹치는 지인도 없었다. 아... 소문은 정말 내가 모르는 어디서도 드러날 수 있다. 그 집 딸이 좀 기가 세다 쪼의 말들이 돌았었나 보다. 소문은 옷을 얻었고 말은 구르니 내 이미지는 뭐가 되었겠나. 그래도 만만하고 무른 것보다 낫지 뭐.
내 전공은 산수와 무관해 처음 일을 시작할 때 차변도 대변도 모른 채로 맨땅에 헤딩했다. 솔직히 지금도 잘 모른다. 그냥 우리 사정에 맞게 적당히 한다. 손바닥만 한 회사, 나는 당연히 경리 일만 하지 않는다. 나는 모든 4대 보험과 각종 대외업무의 담당자. 잘은 몰라도 각종 분야의 기초는 적당히 훑으며 지나왔다. 이게 연차가 쌓이니 어지간한 일에도 이제는 크게 당황하지 않는다. 은행에서 서식에도 없는 자료를 요구해도, 관청에서 역시나 한글 파일만 덜렁 있는 표를 줘도 네네 하며 종이를 채워 보고서를 쓴다. 분야와 직무 상관없이 어지간한 일들을 하다 보니 나한테는 명함과 직급이 솔직히 별로 중요하지 않다. 개밥 사기부터 은행 업무까지 다 하니까. 그저 밖에 나가서는 단정하기만 하면 되지 뭐 하고 차에 구두만 따로 들고 다녔다. 그저 만만하게 대리로 명함을 파고 일을 했다. 그러다 아 이 정도 직급이 이런 자리에 참석을 하세요? 하는 소리를 듣고 건의(?) 해 팀원과 팀장 포함에 달랑 한명인 팀의 팀장이 되었다가 어느 명함에는 실장이 되고 그리고 나이를 더 먹고는 부장이 되었다. 아... 그게 진짜 시간이 지났으니까, 액면가가 그래도 되는 날이 왔으니까, 밖에 나가서 일단 보기에 그럴싸해 보이는 게 나쁘지는 않으니까.
그래도 다 경기 좋을 때의 말이다. 경기가 나빠지고 수직으로 하강하니 '죄송합니다' 사과할 자리가 많아졌다. 문제는 아버지가 일을 자기와 동일시하며 버티시니 나도 경계가 따라 허물어진다는 거다. 이건 일이기도 하지만 아버지기도 하다. 하다보니 모든 일에 진심으로 고맙고 진심으로 미안하다. 이게 사람을 좀 먹는다. 일은 담백하게 일로 하면 된다. 생각은 늘 하지만 감정이 그보다 더 파도치며 넘실거린다. 비난과 원망은 종종 훨씬 센 강도로 나에게 닿는다. 그냥 직원이었다면 진즉에 퇴사했으면 될 일인데 나는 여기서 고인채 동동거리며 죄송합니다 하고 있다. 고통은 경계 없이 나에게 도착했다.
이번 주 로또도 꽝이었다. 정말 진심으로 난 계획을 다 세워뒀다. 농담처럼 깨끗한 돈 세 후 삼억 원츄 하는데 언제나 진심이다. 그걸 10분 만에 다 쓰려면 일일이체한도 상향을 해야겠지. 그게 뭐라고~ 등본 좀 떼고 위임장 쓰면 된다. 그건 일도 아니다. 얼마나 짜릿할까. 밀린 돈들을 다 송금하고 맘 편하게 통장정리를 했을 때 그래도 돈이 남아있는 상상. 아버지는 일과 분리가 안된다 험담을 했는데 나도 이미 그 지경인지 모르겠다.
진짜다. 종종 쫓기는 꿈도 꾼다. 언젠가는 가방 잃어버리는 꿈을 꾸고 일주일 내내 기분이 안좋기도 했다. 가방에 내 품에 돼지가 좀 몰려왔으면. 그럼 바로 로또집으로 달려갈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