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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여여 Sep 02. 2021

11화 문득 할머니의 김치가 궁금했다.

할머니의 김치가 만들어지는 과정

언젠가부터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다. 매번 식탁 위에는 김치가 빠지지 않는다는 것.  올려져 있는 김치는 너무 당연해서 그저 당연하게 받아들였다는 것. 더 넓고 먼 세상에서 배우는 것도 있지만 정작 식탁 위의 김치를 잘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엄마에게 "김치 만들 줄 알아요?"라고 물었는데, 엄마도 할머니가 만들어주신단다. 할머니는 어떻게 당연하게 김치를 만들까. 할머니에게 물어봐야겠다.


눈 내리는 김장 전날, 시골에 있는 할머니 댁에 가기 위해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시골 가는 버스는 처음이라 분명 시간표도 확인하고 계속 기다려 보지만 버스가 오지 않는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렸을까.  "후...." 입김이 나오고 발은 점점 시려온다. 그때 엄마에게 잘 도착했냐는 전화가 왔다. “아직 버스에 타지도 않았어....” 도움 없이 혼자서.... 나의 의도와는 살짝 달랐지만 엄마가 잠시 시간을 내어 준 덕분에 맘 편히 주위를 둘러보며 할머니 집으로 향한다. 어느새 차는 휑한 새하얀 시골길 사이로 조심스레 발을 들인다.


도착해보니 할머니는 또 뭘 하셨는지 이미 작업복 차림새다. 매년 하는 김장이지만 이번엔 할머니를 도와 처음부터 같이 해보고 싶다며 무작정 들이댔다. 눈이 점점 거세지며 '이 추운데 김장을 어떻게 하나...' 걱정도 잠시 할머니에게 내일 올 것을 약속하고 먼저 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김장은 큰 가족행사다. 온 식구들이 할머니 댁에 모여 절인 배추에 양념을 발라 각자 집은 각자가 챙겨가곤 했다. 그런 줄만 알았는데… 어느새 나도 할머니의 작업복 차림새를 갖춰 입고 김장준비를 한다. 큰 칼을 수레에 실어 배추밭에 간다. 할머니가 배추 아랫부분을 잘라주면 배추를 수레에 실는다. 이 정도면 됐겠지.. 하면 산처럼 쌓아 날랐는데 아직 멀었단다. 5남매 식구들의 입은 참 많기도 하지. 몇 번이고 더  배추를 옮긴다. 무게도 무게지만 바퀴 하나 수레의 중심을 잘 잡아야 했다. 할머니가 앞에서 잡아주고 나는 뒤에서 끌며 집에 돌아온다. 그렇게 나르고 나니 할머니는 어떻게 혼자 하셨나 싶다. 나는 벌써 지친 기색이 역력하는데 할머니는 분주하다. 큰 배추는 4등분 하여 소금에 절인다. 배추에 칼집을 몇 번 배추와 소금을 번갈아 가며 켜켜이 쌓기를 반복한다. 어느새 큰 빨간 대야에 배추가 한가득 쌓였다. 그렇게 쟁여두었더니 이번엔 웬 과일들을 가져오신다. 양념장을 만들어야 한단다. 양념에 들어가는 재료는 또 많다. 사과 배와 같은 과일을 모두 깎고 믹서에 갈고 춥다는 생각도 없이 각종 젓갈, 고춧가루들을 한데 섞어 넓은 대야 가득 양념장을 만든다. '김치가 괜히 맛있는 게 아니었어....'


다음날 아침, 서늘한 기운이 나를 깨운다. 마당에 나가보니 할머니께선 절인 배추를 확인하신다. 어제 재운 배추의 윗부분이 살짝 얼어 검지 손가락으로 손을 살짝 대보니 찌릿하다. 그럼에도 할머니는 손을 푹 담그시며 잘 절여졌는지 확인하시곤 아직 덜 절여졌다며 소금을 더 넣야 할 것 같다고 하신다. 할머니의 손은 참 신기하다. 나는 배추가 억세고 따가워 잘 만지지도 못하겠던데, 얼음장같이 차가운 물에 살짝만 담가도 손을 빼고 싶던데. 뭐든 해내는 할머니의 손을 그저 바라본다. 주름진 손은 꽤 단단해 보인다. 절인 배추를 뒤로 하고 파를 다듬는데 할머니의 손은 나보다 훨씬 빠르다. "할머니는 안 따가워요?", "어떻게 그렇게 빨리해요?" 묻는다면 할머니는 그냥 하다 보면 되는겨~ 하시며 본인의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주신다. 순천 부잣집 딸내미가 시집오는 이야기, 자식 키우며 좋았고 힘들었던 이야기, 할머니의 말씀을 듣다 보면 정말 상상할 수 없는 순간들이 많아 그저 위인전을 보는 것 같았다.


세월이란 그런 걸까. 젊은 날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던 그 소녀도 지금은 그 누구보다 단단하고 힘이 세다. 소금에 절여진 배추는 두배 더 무거워진 것 같았다. 손은 정말 얼음을 쥐고 짜듯 뼈가 시릴 정도로 차가웠지만 마음만큼은 할머니의 절친이 된 기분이다.


가족들과 함께 모여 양념장을 바르는 그 순간은 한 부분에 불과했다. 그동안 내가 식탁에서만 접하던 김치처럼. 가까웠던 우리 할머니에 대해서도 잘 몰랐다. 그날의 김치 만들기를 할머니와 함께 준비하며 난 무엇보다 값진 레시피를 얻었다.



그날의 할머니와의 기록.

https://youtu.be/Wpp1twaYn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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