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이모 8년 차다. 바쁜 형부를 대신해 언니 뱃속에 든 쌍둥이 조카의 시중을 들기 시작한 것부터 치면 9년 차라고도 하겠다. 회사로 치면 최소 과장급, 툭 치면 퉁 하고 받아쳐낼 수 있는 연륜이 쌓인 연차다.
게다가 나는 워킹맘이던 엄마를 대신해 9살 아래 동생을 아들인 듯 조카인 듯 20년이나 돌봐왔기에 사실상 웬만한 초보 엄마보다 나은 육아 스킬까지 갖고 있다. 또 여기저기 워킹홀리데이 중에 같이 살면서 키우고 돌본 아이들이 전 세계에 8명이나 분포해 있다. 글로벌하기까지 하다.
각설하고, 나는 이모라는 호칭을 참 좋아한다
28살 봄, 회사 사수가 6살 난 딸을1박 2일 출장에 데려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언니가 도와줄게"가 입에 배었던사람이었는데, 해맑은 눈빛으로 "이모, 도와주세요'하는 그 아이의 말에 마음이 꿀렁였다.
내가 아이들의 이모이길자처한건 바로 그 때부터 였다.
Drawing by 조카2호
이모 6년 차이자 제주생활 6개월 차 일 때의 일이다.
조용한 카페를 찾아 글을 쓰기 시작하는데 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 이모~
사랑스러운 조카의 목소리였다.
- 귤 사와
아니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귤 내놓으란다. 지난번에는 귤향과즐 더 사 오라고 제주로 등 떠밀더니 이번엔 귤이라니. 내가 보고 싶어 전화를 한 게 아니라는 생각에 괜스레 돈이 없다고 심통을 부려봤다.
- 그럼, 돈 벌어서 사와
아. 요즘 애들이 영특하다는 걸 또 잊고 있었다. 내 조카도 요즘애들인 것을. 요 녀석이 어떻게 나오나 궁금해 계속 질문을 이어갔다.
- 사가면 돈 줄 거야?
- 응, 나 만원 하나랑 천 원 하나 있어.
본인 군것질거리랑 작은 장난감 정도는 살 수 있으니 꽤나 두둑이 있는 듯 으스대며 말을 한다.
- 그럼, 새콤한 거 사갈까 달콤한 거 사갈까. 새콤한 거(극조생)는 쪼끔 싸서 많이 살 수 있고 달콤한 거(조생)는 좀 더 비싸서 조금 사갈 수 있는데.
조금은 심오한 질문에 잠시 대답을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음..... 적당히 사와.
세상에나, 우리 엄마 비밀 레시피 같이 엄청나게 어려운 표현을 이렇게 적절하게 쓰다니.
요 깜찍한 녀석이 내 말문을 턱 막아버렸다.
그리곤 다른 녀석이 빨리오라며 마무리 인사를 건넸다.
- 빨리 가면 뭐 있어? 뭐 해줄 건데?
- 새로운 장난감 있어. 막 방귀 뀌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기네 끼리 꺄르르르르 웃는다.
그랬다. 이 녀석들은 이모가 줄 수 있는 것을 당연스레 요구하는 것 같으면서도 본인들에 제일 소중한 것을 같이 공유할 수 있는 특권을 베풀고 있었다.
모습과 방법은 달라도 우리는 서로 엄청나게 사랑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작년 여름부터 아이들은 방학마다 제주에 온다. 벌써 세 번째 방문이다. 부모도 없이 한 달 넘게 지내는 걸 보면 참 대견하다. 엄마가 없을 때는 이모가 엄마 대신하는 거라고 새뇌를 시켜놔서 그런지 집에서 쫓겨나면 갈 곳이 없다는 걸 아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나를 참 잘 따른다.
조카들을 보며 이모가 엄마의 대리인 같은 존재가 아닐까 싶어 한자까지 확인한적도 있었다. 어미 '모'자가 들어가긴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그런 의미는 어디에도 흔적이 없었다.
글을 마무리하다 보니 하늘나라 간 이모가 생각난다. 엄마보다 20살이나 많아서 20년 가까이 친척 할머니로만 알고 있었던 우리 이모. 꼬막 한 자루와 보라색 무가 든 갓김치를 한 아름 이고 지고 오시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