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방랑 이모야 Mar 18. 2022

마시판이 뭔가요

먹으면 살찌는 그것

스웨덴 빵집은 특유의 묘한 분위기가 있다.


투박한 건강빵이 쌓여있는 구수한 갈색 빵집도 아니요, 우리네처럼 식욕 자극하는 형형색색 빵과 세련미로 무장한 베이커리도 아니다. 장사는 하고 있는 건가 싶게 내부 조명은 살짝 어둑하고 몇 가지 안 되는 빵이 아늑한 느낌을 자아내어 은은하게 가게를 가득 채운다. (물론 큰 도시로 갈수록 오래된 곳은 더욱 고풍스럽고 새로 생긴 곳은 모던하다.)


스웨덴 가정에서 식사나 간식 대용으로 소비하는 빵은 마트에서 구매하거나 집에서 직접 만들어 먹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동네빵집(bageri, 바게리)에서는 주로 케이크(tårta, 토르-타)나 오픈 샌드위치(smörgås, 스뫼르고스)를 커피와 함께 판다.


그럼 가장 많이 팔리는 케이크는 무엇일까.


누구에게 물어볼 것도 구글링을 할 필요도 없다. 진열장에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그것, 공주 케이크(princesstårta, 프린세스토르-타)다.

공주 케이크는 바닐라(커스터드) 크림과 잼(sylt, 쉴트) 층으로 켜켜이 구성된 스웨덴의 대표적인 돔 형태(요즘은 길쭉한 네모 형태로 팔기도 함)의 연둣빛 케이크. 약간의 슈가파우더와 아몬드 페이스트(marsipan, 마시판)으로 만들어진 연두색 바탕과 붉은 분홍빛 장미(ros, 루스)가 포인트!! 굳이 화려하게 장식하지 않고 모자란 듯 모자라지 않은 꾸밈이 참 스웨덴스럽다.

요즘엔 오리지널 연두색 외에도 예쁜 연보라색이나 노란색도 판매되고 있다. 겉으로 보이는 마시판 색과 잼 종류에 따라 미미하게 맛이 다를 뿐인데 여전히 연두색 케이크가 스태디셀러다.
Photo by Emoya


어느 날 적십자(rödakorset, 뢰다코르셋) 공부방에 새로운 할머니 봉사자가 오셨다. 은발이 된 나이에도 불구하고 정갈한 단발이 잘 어울리는 전직 변호사시란다. 커리어 우먼의 멋짐이 여전히 폭발하는 분이셨다. 그분과 함께한 첫 수업 주제는 스웨덴 케이크였다. 음식이 주제인 것만으로도 기분 좋은 수업이었다. 그런데 반복적으로 'marsipan ros'가 계속 나오는 것이 거슬렸다. ros가 장미인 건 알겠는데 도대체 마시판이 뭔지 궁금해서 열성적인 설명을 결국 중단시켰다.


마시판이 뭐냐는 물음에 멋쟁이 할머니는 대답하셨다.

- 아몬드 뭐시긴데, 아몬드 가루랑 설탕이랑 뭐랑 뭐랑 어찌어찌해서.... 근데 조심해. 살쪄!


앗!! 살찐대. 희한하게 이런 말은 단어도 문법도 몰라도 귀를 패스하고 뇌에 바로 꽂힌다. 내가 어설픈 미소를 띄우니 혹시 못 알아들은 걸까 봐 친절하게 일격의 한마디를 덧붙이신다.

många kilon(몽야 실론, many kilogram)!!!
Masipan by Mimmi


늘씬하게 멋진 할머니가 이렇게까지 얘기하시니 함부로 먹으면 안 되는 음식 같기도, 지금까지 멋짐을 유지하는 비결 같기도 했다.


마시판은 아몬드, 설탕, 달걀을 매끈하게 섞은 반죽으로 영어식 발음으로 마지판/마지팬으로 알려져 있으나 한국에서 많이 쓰이는 재료는 아니다. 들어가는 재료만 봐도 칼로리 폭탄! 하치만 단것보다 짠 것을 더 자주 접하는 스웨덴 사람들에겐 작정하고 먹는 달콤한 음식이랄까. 생크림 케이크와는 다른 달콤함과 부드러움이 있다.

 

내가 달다구리나 빵을 즐기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베이커리 진열장에 있는 예쁜 케이크는 홀린 듯 넋 놓고 보게 된다. 이것이 자연의 섭리다. 하지만 이 연둣빛 케이크는 눈길 한번 주기가 어렵다. 장식용 모형 케이크 내지는 불량한 맛이 날 것 같은 두려움에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이 글을 쓰다 보니 문득 어릴 적 먹었던 90년대 버터크림 케이크가 떠올랐다.

마치 잘 만들어진 모형 같은 광택으로 무장한 묵직한 크림과 무엇으로 만들었는지도 모르지만 서로 먼저 먹겠다고 달려들던 분홍 장미에, 딸기 모양 젤리까지. 지금 먹으라고 하면 어릴 때 추억으로 한두 입 먹다가 금세 질려서 멀찌감치 밀어 놓을 그 케이크 말이다.


이러나저러나 아직도 맛난 케이크를 앞에 두고 계속해서 떠오르는 그 말...


많이 먹으면 살쪄   
.


지난 스웨덴 워킹홀리데이 중에 발견했거나 궁금했던 스웨덴 생활과 문화에 대해 공유하고 있습니다. 글 내용과 관련한 스웨덴어는 별도의 블로그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마시판 에피소드에 관한 스웨덴어 공부(feat.프린세스토르타)


 본 매거진 내 글과 그림, 사진의 무단 도용 금지

이모야가 글 쓰고, 밈미가 그림 그리고 올라가 검토해줘요





이전 02화 살 찌게만 하소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