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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 전쟁

대한민국의 쓸쓸한 역사와 현재

by 권사부 Mar 08.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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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이념전쟁이 끝나지 않는 이유는 단순히 남북한의 정치적 대립 때문이 아니라, 그 뿌리가 조선의 자주독립이 완성되지 못한 역사적 배경에 있다. 조선이 근대화의 흐름을 타지 못한 채 외세에 휘둘렸고, 독립운동이 분열된 채 내부적으로 강한 정치 세력을 형성하지 못한 상황에서 2차 세계대전이라는 국제정세 속에서 일본이 패망하면서 독립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문제는 독립이 외부의 힘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을 쟁취하지 못했기에 해방 이후 국가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외부 세력의 개입이 불가피했고, 친일 세력과 독립운동 세력,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미국과 소련이라는 대립 구조 속에서 남한과 북한이 각자의 이념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체제가 구성되었다.


조선이 19세기말 일본 제국주의의 확장 속에서 식민지가 되었을 때부터 이 문제는 시작되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제국주의 국가로 변모했고,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를 꺾으면서 조선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했다. 이후 러시아가 조선과 만주에서 일본과 대립각을 세우자 일본은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켰고, 1905년 미국과 영국의 묵인 아래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하여 조선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같은 해 일본은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고, 1910년 한일병합조약을 통해 조선을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었다. 일본의 식민 통치는 단순한 정치적 지배를 넘어 경제적 착취와 문화적 동화를 강요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조선의 경제 구조는 일본의 산업을 지원하는 형태로 개편되었으며, 쌀 생산은 일본 본토로 수출되었고, 조선의 공업화는 철저히 일본 중심의 군수산업 보조 기지로 설계되었다. 또한, 조선인들의 민족적 정체성을 말살하기 위해 창씨개명, 신사참배, 일본어 교육을 강요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의 지배층 일부는 친일 세력으로 돌아서 일본의 식민지 체제 속에서 권력과 경제적 이익을 확보했고, 이들이 해방 이후에도 권력을 유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반면 독립운동을 한 세력들은 해외로 망명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조직하거나, 만주와 중국에서 무장투쟁을 이어갔지만, 하나로 통합되지 못한 채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 공산주의 계열로 갈라지며 내부적으로도 갈등을 겪었다. 3·1 운동 이후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졌지만 내부 분열과 재정 문제로 조직력이 약화되었고, 독립군들은 만주에서 일본군과 싸우면서도 중국과의 협력 관계 속에서 입지를 다져야 했다. 만주의 독립군들은 서로 통합되지 못한 채 신민회 계열, 대종교 계열, 사회주의 계열로 나뉘었으며, 일본군과의 전투에서도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했다. 1920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에서 독립군이 일본군을 크게 격파했지만, 이후 일본군의 간도참변(경신참변)으로 인해 많은 독립군과 조선인들이 희생되었다. 이에 따라 독립군들은 소비에트 연방으로 이동했지만, 소련 공산당의 대숙청 과정에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숙청당했다.


1930년대에는 독립군들이 중국 국민당과 연합하여 한중연합작전을 펼쳤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 이후 일본은 중국 내 조선 독립운동 세력을 더욱 강하게 탄압했다. 이에 조선의용대와 한국광복군이 결성되어 중국 전역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였고,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미국과 연계하여 대일 항전을 준비했다. 하지만 이러한 무장투쟁에도 불구하고, 조선 내부에서는 독립운동 세력들이 하나로 뭉치지 못한 채 분열되었고, 이들은 해방 후 정치적 주도권을 잡지 못하는 결정적 한계를 드러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일본은 더욱 아시아에서 전쟁을 확대했고, 1941년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면서 미국이 참전했다. 일본이 패망한 결정적 계기는 1945년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것이었고, 결국 일본이 항복하면서 조선은 해방을 맞이했다. 하지만 이 해방은 독립운동의 성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외부의 힘에 의해 주어진 것이었다. 이 때문에 한국은 주체적인 독립국가로 바로 설 수 없었고, 미국과 소련이 38선을 기준으로 조선을 분할 점령하면서 본격적으로 남북한의 이념 갈등이 시작되었다. 소련은 김일성을 앞세워 북한에서 공산주의 정권을 세웠고, 미국은 이승만을 중심으로 남한에서 친미 정권을 수립했다. 이 과정에서 중국에서 항일 투쟁을 했던 독립군들은 남북 어디에서도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지 못했다. 결국 남북한의 이념 대립은 한국전쟁으로 폭발했고, 1950년 북한이 남침하면서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은 단순한 내전이 아니라 미·소 냉전의 대리전 성격을 띠었으며, 미국과 중국이 개입하면서 전쟁은 국제전으로 확산되었다. 1953년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지만 남북한은 각각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체제를 더욱 강화하면서 서로를 적대하는 구조로 굳어졌고, 이 과정에서 반공주의와 반미주의가 각 체제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았다.


남한에서는 친일파 청산이 실패한 채 친일 세력들이 경제적·정치적 권력을 유지했고, 독립운동가들은 오히려 탄압을 받거나 정치적으로 배제되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 중심의 1인 독재 체제가 확립되면서 공산주의 독립운동가들이 정권을 장악했지만, 이는 곧 내부 숙청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역사는 대한민국의 이념전쟁이 끝나지 않는 구조적 원인이 되었다. 독립을 스스로 쟁취하지 못한 역사적 한계가 해방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졌고, 친일파 청산의 실패와 독립운동 세력의 정치적 소외, 냉전 속에서의 반공주의 강화가 대한민국 내부에서 이념 갈등을 지속시키는 구조를 만들었다. 남북한 모두 체제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상대방을 적으로 설정했으며, 정치적 필요에 의해 이념 갈등이 지속적으로 재생산되었다. 대한민국이 이념전쟁에서 벗어나려면 무엇보다도 자주독립이 완성되지 못한 역사적 배경을 직시해야 한다. 독립운동의 성과를 제대로 평가하고, 친일파 청산 문제를 더 이상 회피하지 않으며, 냉전 구조 속에서 이념이 정치적으로 이용된 현실을 반성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한민국의 이념전쟁은 앞으로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쓸쓸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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