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된 것들에 대하여

전쟁 같은 사랑

by Janet M



어렸을 적 동네에 한 아주머니가 있었다.

흐트러진 자신의 모습이 싫어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얼굴에 뽀얀 분을 바르고 입술을 빨갛게 칠하며 늘 화려한 옷을 입고 다니시던.

아이를 낳으러 병원에 갈 때에도

뽀얀 얼굴을 하고 갔다던 그 아주머니의 일화는 이미 동네에서 유명했다.

자신의 맨 얼굴을 타인에게, 심지어 남편에게까지

단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다던 그 아주머니가

그토록 놓고 싶지 않았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얼굴을 덮고 있던 화장품을 모조리 지워내고, 속옷을 모두 탈의하고,

산부인과 글씨가 희미하게 빛바랜 빳빳한 병원복을 입은 채 기진맥진 누워있는 내 모습에

스스로 좀 기분이 좋지 않았던 것 같다.

아니, 뭔가 커다란 것을 잃어버린 느낌이라고 할까?

그것은 비단, 내 몸 한가운데를 터질 듯이 꽉 채우고 있던 아기가 나온 허전함 같은 것이 아닌,

열 달의 고행의 끝에 마주한 내 모습에 대한 상실감 같은 것.


아기를 무사히 만난 기쁨의 저 반대편에 여전히 남아있는 육체의 고통과

퉁퉁 부은 얼굴을 거울 속에서 마주했을 때,

남모르게 삼켜야 했던 은근한 우울감은 아마도

육아의 현재 진행형인 우리 모두의 가슴에 남아있지 않을까?


돌이켜보면, 출산을 축하하기 위해 병원을 찾은 지인들을

원초적인 모습으로 대해야 했을 때도 참 많이 불편했던 것 같다.

머리를 빗어 넘길 때마다 한 움큼씩 빠지는 머리카락들을 보며 꽤 여러 번 상심했던 것 같다.

아이라는 크기의 행복감은 그 모든 상실감들을 이겨내기에 충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그 상실감들을 다독여줘야 할 필요성은,

마치 어린 시절 동네에서 늘 뽀얀 얼굴로 나를 맞이하던 그 아주머니와 같은 것이다.


놓고 싶지 않던 여성성에 대하여,

현실이라는 그림자에 파묻혀 제대로 한 번 돌아봐주지 못했던 자신에 대하여,

우리의 어머니 세대가 알려주지 않은 그 본질에 대하여 묻고 싶다.


정성을 들인 음식은 아이를 자라게 하지만, 잘 다독여진 감정은 아이를 평생 행복하게 한다.

아이의 감정은 엄마로부터 전해진다.

그래서 가장 먼저 엄마가 행복해야 한다.


어렸을 적 동네의 그 아주머니는 그게 행복이었나 보다.

자신을 스스로 꾸미고 예쁘게 함으로써 얻어지는 소소한 행복,

그 힘으로 아이를 키워냈겠지.


그렇다면 나는? 당신은?







곧 흘러 넘 칠 듯.

곧 끓어오를 듯.

곧 불타오를 듯.


엄마의 온도는 99도이다.


빛바랜 소녀시대에 대하여,

잃어버린 여성성에 대하여,

지워진 자아에 대하여,

상실된 그 모든 것들에 대하여.


결정적인 1도를 품은 무언가가 툭 하고 마음을 건드릴 때,

마침내 부글부글 끓어 넘칠지 모른다.


그리하여 가끔씩의 시원한 바람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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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였던 날의 언젠가,

거리를 배회하다가 식당 구석 자리에 앉아 밥을 먹고,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데

문득 혼자라는 사실이 평화롭기보다 외로운 마음이 더 컸던 것 같다.


지금의 나는,

잠시나마 아이를 잊고, 삼시세끼 뭘 만들지 반찬 걱정을 잊고,

혼자서 거리로 나와 먹고 싶은 음식을 먹고

카페에 앉아 음악이 흘러나오는 이어폰을 귀에 꽂으며 세상과 잠시 단절한 채

종일 책을 읽고 싶다.


고요함의 오랜 부재(不在)로

문득 혼자였던 날들에 대한 그리움이 몰려와 유난히도 심신이 지치는 날들.

그러나 언젠가 아이가 커서 얼굴 보기가 힘들어질 때,

훌쩍 커버린 네가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함께 외식 나가기를,

함께 여행 가기를 거부할 때

나는 다시 지금이 미치도록 그립겠지.


내 키를 훌쩍 넘어선 너의 모습을 상상하는 일,

내가 지금의 이 어렴풋한 상실감을 이겨내는 방법.

그래, 모든 것은 삶의 연속선상에 있을 뿐.







아이가 돌이 되어갈 무렵 생각이 많아졌다.

나의 사회적인 커리어에 대해서.

아이를 안고 장을 보고 산책을 하고 어쩌다가 차 한 잔을 사 먹고,

그저 남들 눈에는 어느 평범한 주부로 보일 테지만 아이가 크고 나면 나는 어떤 일을 해야 할까.

내가 늘 꿈꿔왔던 커리어를 이루기 위해서는 당장에라도 다시 일터로 돌아가야 하지만,

이미 너무 많이 쉬어버린 것 같은 느낌은 지울 수가 없다.


아이는 여전히 나의 손길을 필요로 하고 있고,

나의 노동 없이도 사회는 잘 돌아가고 있다.

그래서 마음이 붕 떠버린 기분으로 알 수 없는 무언가에 나는 매일 쫓기고 있었다.


함박눈이 소리 없이 내리던 어느 겨울날,

어설픈 걸음마로 발을 떼는 너를 데리고 밖에 나갔다가

이런저런 고민들에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데,

태어나 눈이 내리는 모습을 처음 바라보는 너의 환한 얼굴을 보는 순간,

내 걱정 근심들이 새하얗게 지워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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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너에게는 하루하루가 태어나 처음 맞는 순간들이겠구나.

내 눈 앞의 풍경이 이렇게나 새하얀데, 너라는 빛으로 눈이 부시도록 환한데.

눈앞의 행복을 늘 가까이에 두고도 장님처럼 살아온 것은 아닌지.


온 신경을 곤두서지 않으면,

이를 악물고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너를 지킬 수가 없을 것만 같아 발을 동동 굴렀는데

사실 나는 너 때문에 흔들린 것이 아니라,

너로 인해 중심을 잡을 수 있는 것이었어.


결국, 나의 상실감을 채워줄 수 있는 건 또다시 너였던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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