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여자의 중간쯤에서

전쟁 같은 사랑

by Janet M



잠든 아이를 아기띠에 메고 친정집엘 갔다.

결혼하고 2년이 채 안되어 아직 친정집에는 내 방이 그대로 있었다.

피곤하면 언제든 몸을 던져 쉴 수 있었던 침대와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이것저것 쓰고 그리던 책상.


잠든 아이를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히고 방바닥에 앉았다.

20년 가까이 쓰던 내 방이지만 이제는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낯설고도 익숙한 방.

책상의 서랍을 열어 필요한 물건들을 찾다가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별 것 없었지만, 반짝반짝 빛나던 스무 살의 그때.

나는 길게 늘어뜨린 머리와 볼 빨간 꽃다운 모습으로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정말이지, 이렇게 풋풋할 수가 없다.

신발장 한편에는 아직도 내가 즐겨 신던 굽 높은 하이힐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잠시 머물다가 가버린 것 같은 스무 살의 날을 고이 접어 가방에 넣고 잠든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피곤할 텐데 눈 좀 붙이라는 친정 엄마의 말이 나를 거리로 내몰았다.

이때가 아니면 힘들 것 같은 혼자만의 시간,

나는 아이를 잠시 맡기고 산책을 나왔다.

출근을 하기 위해 이른 새벽 버스를 기다리던 정류장과

화장품을 즐겨 사던 코스메틱 매장,

나른함을 쫓기 위해 커피 한 잔을 사들고 나오던 카페와

언제든 앉아 쉴 수 있었던 아파트 앞 공원.


아이로 인해 내 인생이 송두리째 변한 것 같아도

거리의 나무들과 새들은 여전히 예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거리의 모든 것들이 애틋했다.

마치, 11시 30분쯤의 배고픔과 졸림을 무릅쓰고

지루하게만 들려오는 선생님의 역사 수업을 들으며

곧 다가올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의 달콤함을 애타게 기다리는 고등학생의 기분으로,

아이를 잠시 맡기고 나온 내 마음이 딱 그러했다.

매점에서 산 새하얀 크림빵을 먹으며 수다를 떨다가

5분 늦게 들어가게 된 교실 앞에서의 그 떨림과,

집에 바로 들어가지 않고 어쩌다가 오락실에서 한 시간을 놀아버린

그 작은 반항이 주는 두근거림이 엄마가 된 나에게 아직 남아있는 듯.


나에게 잠시 허락된 이 짧은 휴식이 이제는 당연한 것이 아닌

삶의 일탈처럼 느껴져 가슴이 두근두근하는 것이 엄마의 삶일까.

그게 아니면,

로드샵의 쇼윈도에 걸린 잘 빠진 옷 한 벌을 보며 사고 싶은 충동을 애써 억누르고

당장 가슴팍에 안고 다녀야 할 아기를 생각하며 체념하는 것이 여자의 삶일까.

또한, 틈틈이 나에게 우유를 주고 잠을 재우며

시부모까지 모셔야 했던 엄마의 삶에 대해서 곱씹어보다가

젊은 날들을 송두리째 반납해야만 했을 것 같은 그 먹먹함에 목이 메어와

아이를 맡긴 것에 대한 미안함으로 서둘러 발걸음을 돌리는 것이 딸의 삶일까.


헤매는 그 중간쯤에서 나는 어떤 엄마이고 어떤 여자일까.






아이가 먹다 남은 밥으로 대충 끼니를 때우고,

다 식어버린 커피를 벌컥 들이켜고.

무릎 나온 바지에 늘어진 목, 가슴팍에 얼룩진 우유 자국.

언제 긁혔는지 모를 손등 상처들과 반창고를 붙일 겨를도 없이 물마를 날 없는 빼곡한 시간들.


흔한 감기약 하나 먹을 여유도 없이 밤새 아픈 아이 곁에서 새우잠을 자고,

티 안 나는 집안일들은 밀려있고 돌아서면 치워야 할 아이의 흔적들이 가득한 집.

전쟁 같은 하루를 정신없이 보내고 문득 찾아온 고요함에 생각나는 그리운 친정 엄마,

주름졌지만 따뜻한.


우리 엄마도 이렇게 살아온 걸까.

내가 쓰고 남은 시간들을,

어린 내가 맘껏 어지르며 쓰고 남은 자투리 같은 시간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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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엄마와 여자의 중간쯤에서

엄마 쪽에 가까운 것인지 여자 쪽에 가까운 것인지 매일 답을 알 수가 없는데

누군가 아이를 봐주는 날에는 거리낌 없이 나도 한 여자임을 상기하게 되는 것이다.

미용실도 가고 네일아트도 받고, 예쁘게 치장도 하면서.


설령 머리는 매일 묶게 되더라도,

손톱은 금방 벗겨지게 되더라도,

잠시 머물다가는 완전한 여자도 꽤 나쁘지 않다는 느낌 하나가

어중간한 나를 버티게 하는 것이다.


작은 너와 함께이면 나는 백번 천 번 엄마인 게 좋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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