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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홍 Apr 30. 2024

일흔셋 아빠가 빨래를 접는 이유

아빠를 싫어하는 딸






아빠에게는 특별한 재능이 있다.

뽀송뽀송하게 마른빨래를 정사각형으로 보기 좋게 다림질하듯 접어 내는 재능. 부피가 작은 속옷이나 나시는 돌돌 말아 깔끔하게, 양말은 끝부분을 안으로 잘 접어 넣어 반듯하게.


 

아빠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온 가족의 빨래를 개 주었다. 네 식구의 빨래를 돌리는 일은 암묵적 그의 일이었고 그는 이 일을 즐기는 것 같았다. 세탁기 돌리기를 시작으로 오빠와 나의 교복을 빳빳하게 다려주는 것으로 마무리하는 일.



일흔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아빠는 여전히 이 일을 하고 계신다.



사실 나는 아빠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더 솔직히 나는 아빠를 싫어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예민하고 우울한 그의 기운의 늘 가족을 불안하고 힘들게 했다. 일이 잘 안 풀리면 온 가족을 들들 볶았고 어떤 날은 술을 잔뜩 마시고 들어와서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때로는 그가 차라리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엄마와 다툼이 심해질 때면 난 늘 이런 생각에 휩싸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아빠와 별로 말을 섞지 않았다. 그가 말을 걸면 늘 퉁명스럽게 대꾸하거나 짜증을 냈다.


 


나는 집이 싫어 늘 밖으로 나돌았다. 학창 시절에는 친구들과 우르르 몰려다녔고 성인이 되어서는 기회만 되면 어디론가 훌쩍 떠났다. 많은 곳을 여행했다. 아프리카, 남미, 인도. 남들이 잘 가지 않는 곳만 찾아다녔다. 그런  곳에 가면 이상하게 안심이 됐다.


 

탄자니아 사막에서 힘겹게 살아가거나 볼리비아의 고산지대에서 물을 길어 마시는 이들을 보면 묘하게 위로가 됐다. 내 삶이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늘 혼자의 삶을 꿈꿨다. 아빠를 마주치지 않아도 되고 신세 한탄만 하는 엄마를 보지 않아도 되는 삶. 무언가 견디지 않아도 되고 억지로 버티지 않아도 되는 그런 자유로운 이데아를 꿈꾸며.  

 



그리고 얼마 후 그 꿈을 이루는 순간이 왔다. 서른이 넘어 집을 떠나게 된 것이다. 처음 맞는 독립. 무엇보다. 이 지긋지긋한 집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 일까. 이상하게 혼자의 삶은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 집만 벗어나면, 꼴도 보기 싫은 아빠에게서 멀어지면 온 세상이 내 것이 될 줄 알았는데 내 맘은 그리 홀가분하지 않았다.


 

문득 책에서 본 문구가 떠올랐다. ‘인간은 낯선 행복보다 익숙한 불행을 좇아간다’ 내가 딱 그런 것 같았다.


 

혼자인 집에서는 생각할 시간이 많았다. 21평 아파트는 쓸데없이 넓었고 거실에서 보이는 푸르른 산은 오히려 내 마음을 더 울적하게 만들었다.

 

 


이유 없이 화가 나고 슬픈 날이 많아졌다. 집을 떠나오면 이런 감정들이 사라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암울한 기운은 더 자주 오래도록 나를 찾아왔다.   


 

그럴 때면 거실 한편 네모난 식탁에 앉아 글을 썼다. 사실 글보다는 일기에 가까웠지만 머릿속 어지럽게 흩어진 생각들을 조악한 문장으로 만들고 나면 마음이 안정됐다.


 

두서없이 쓴 글의 대부분은 아빠와 엄마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는 왜 아빠를 미워하는지, 왜 엄마에게 연민을 느끼는지. 그렇게 차근차근 이유를 찾다 보니 알 수 없었던 감정의 근원이 뽀글뽀글 떠올랐다.


 



나는 아마도 아빠를 너무 사랑했던 것 같다.


 

꼬꼬마 시절 나는 아빠를 무척이나 따랐다. 식당을 하던 아빠가 점심 장사가 끝나고 재료를 사러 갈 때면 나는 늘 아빠를 따라나섰다.



자주색 엘란트라 조수석은 늘 내 지정석이었다. 운전석에서 창문을 활짝 열고 담배를 태우는 아빠를 바라보며 그를 째려보기도 하고 일부러 큰 소리로 콜록콜록 거리기도 하며 눈치를 주었다. 그럼 아빠는 내 눈치를 보며 서둘러 담배를 껐다(그때는 실내에서도 담배를 피우던 시절이다).



시장에 도착해선 장 보는 아빠 손을 꼭 잡고 쫄래쫄래 쫓아다녔다. 그러면 재료상 할머니들께서 기특하다며 천 원 이천 원 쌈짓돈을 쥐어 주셨다. 나는 그 순간이 가장 행복했다.


 

나는 진심으로 아빠가 좋았다. 누군가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물어보면 언제나 고민 없이 아빠였다. 로봇처럼 정해진 이 답에 엄마가 서운해할 정도로.



 집이 어려워지기 전 아빠는 누구보다 자상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엄마 아빠 두 분이 힘겹게 일하면서도 늘 오빠와 나의 아침을 챙겨 주었고 주말에는 온 집안 청소를, 빨래와 요리도 도맡았다.



늘 해달라는 걸 다 해주기 위해 노력했고 없는 살림에도 힘겹게 일하며 우리를 뒷바라지했다. 아침 6시부터 일어나 밤 11시에 들어오는 생활을 반복하며.





그러던 중 부모님이 바빠졌고 오히려 두 분의 사이는 더욱 안 좋아졌다. 그 사이 작은 아버지에게 섰던 빚보증이 문제가 되어 가세가 크게 기울기도 하고 가게 경영이 어려워져 문을 닫을 뻔하기도 하고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아빠는 그렇게 큰일이 있을 때마다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했다. 그런 날이면 늘 집에 들어와 엄마와 크게 다투었고 언제부턴가 술을 입에 달고 살았다. 점심이나 저녁에 가볍게 반주처럼 마시던 술이 언제부터 1병 2병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나는 서서히 아빠와 멀어졌다.

 

 

하지만 혼자 살면서, 집에서 나와 글을 쓰며 조금씩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지겹게 싸우면서도 헤어지지 않고 가정을 지킨 두 사람의 의지와 오빠와 나를 포기하지 둘의 마음을 어렴풋이.


 

사실 혼자 글을 쓰며 참 많이 울었다. 감정적으로 불우했던 나의 어린 시절과 부모님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글을 쓰고 나면 진이 다 빠졌다. 내 안에 쌓여있던 모든 감정들이 한꺼번에 빠져나오는 느낌이었다.



내 감정이 이런데 부모님은 얼마나 힘들었을지 이해가 됐다. 하루 종일 12시간 이상 일하고 돌아와 오빠와 나의 뒤차닥거리까지 하던 두 분의 마음을.

 


사랑의 반대말은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다. 내가 아빠를 그토록 원망했던 이유는 그만큼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나는 사정상 얼마 뒤 다시 본가로 돌아왔다. 물론 이놈의 ‘집구석’은 여전하다. 부모님은 요즘도 가끔씩 싸우고 비어 있던 내 방도 변한 게 없다.



하지만 바뀐 것도 많다. 가장 큰 건 아빠가 술을 끊으셨다는 사실이다. 간 건강이 나빠져 이제는 자의 반 타의 반 술을 입에도 대지 않는다. 덕분에 집안이 조용해졌다. 나의 마음가짐도 바뀌었다.

 


나는 더 이상 아빠를 미워하지 않는다. 엄마에게 연민을 느끼거나 원망하지도 않는다. 이제 모든 것에 감사할 뿐이다. 아직도 돌아올 집이 있다는 사실이, 지금도 다 큰 딸내미의 빨래를 개 주시는 아빠가 곁에 있다는 사실이.

 


나는 조금씩 아빠의 삶을 이해해 가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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