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학년에 올라가자 선생님들이 가정방문을 한다고 했다. 갑자기 가정방문을 한다고 하니 참 난감했다. 너저분한 우리 집을 선생님께 보여드린다는 게 민망스러웠다. 어머니 아버지도 난처하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우리집은 일곱 아이 등쌀에 벽지 하나 제대로 붙어있는 곳이 없었다. 어머니는 마루에서 바로 보이는 안방 아랫목 쪽만 급히 도배를 하셨다. 그리고는 안방과 윗방 사이 미닫이문을 닫아 놓으셨다. 아버지는 마당에 수북이 쌓여있던 잿더미를 치우셨다. 나는 파란 플라스틱 옷 선반이었던 초라한 내 책장을 정리했다. 그러다가 선생님이 사랑방까지 들어오시지는 않을 것 같아 대충 마무리해 버렸다. 도무지 가정방문을 왜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동네별로 가정방문 날짜가 정해졌다. 우리 동네는 토요일 방과 후였다. 선생님들이 먼저 다녀간 다른 동네의 반 친구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봤다. 가정방문은 선생님이 집에 와서 밥을 먹고 가는 거라고 했다. 나는 살짝 마음이 놓였다. 우리 어머니는 동네에서 요리 잘한다고 소문나 있었다. 지저분한 집도 어머니의 밥상으로 왠지 만회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멀게만 느껴졌던 토요일이 다가왔다. 한 시간은 족히 걸어와야하는 우리 동네까지 선생님이 잘 올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서둘러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가 잔칫상을 차려놓았다. 뜰의 신발도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늘 보이던 아버지의 검정 고무신과 남색 고무장화도 보이지 않았다. 아랫도리를 거의 벗고 살았던 쌍둥이도 말끔한 옷을 입고 있었다. 곧 동생네와 우리 선생님 두 분이 상에 둘러앉았다. 나는 부끄러워 부엌에서 어머니가 퍼주시는 밥을 쟁반에 담아 셋째 동생에게 상에 올리라고 들려 보냈다.
어머니 아버지가 밥상을 마주하고 앉아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나누셨다. 언뜻 정 넘치게 밥을 많이 주셔서 감사하다는 소리도 들렸다. 우리 자매들은 쌍둥이 동생을 데리고 사랑방에 가 있었다. 한 시간 남짓 되었을까. 선생님들이 부모님과 인사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여전히 부끄러워서 사랑에 있었다. 문틈으로 바라보니 언니와 셋째 동생은 선생님을 배웅하고 있었다. 선생님이 다녀가신 후 숙제를 끝낸 듯 마음이 후련했다. 주말이 더 즐거웠다.
월요일이 되어 학교에 갔다. 사회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조선시대 종들에 관해 이야기하셨다. 그러다가 옛날 사람들은 무식하게 고봉밥을 먹었다고 말했다. 나는 충격을 받았다. 우리 어머니도 선생님께 고봉밥을 대접했다. 나를 겨냥한 건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다.
그날 이후로 나는 교실에서 소심한 아이가 되었다. 나를 예뻐한다고 믿었던 선생님도 멀리하게 되었다. 그 시절 그 시골에서도 촌지가 오갔다고 한다. 우리 어머니는 촌지를 주지 않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