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단상 #과정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한 것에 대한 단상>
세상에는 결과보다 과정이 더 중요한 경우가 아주 드물지만 가끔 있다.
너무나 안타까운 것이 이런 일은 과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내가 하는 기자라는 일은 특히 그렇다.
기사나 사진 한 장을 위해서 엄청나게 노력을 기울이지만, 항상 드러나는 것은 허술하기 짝이 없는 기사요 달리는 것은 온갖 욕이 난무하는 악플뿐이다.
어린 주니어 기자일 때는 많이 속도 상하고, 왜 몰라 주나 싶었지만, 사실 이 일을 시작한 것도 어쩌면 자기만족 아니었나 싶으니 이제는 그냥 그러나 보다 한다.
내가 SNS를 시작한 뒤 좋은 점을 꼽으라면 '나'를 상품화해서 기자들의 숨은 노력이 조금이나마 드러난다는 것이다.
물론 기자가 모든 경우에 생고생하면서 기사를 쓰는 것은 아니다. 항상 마감에 쫓기는 기자들은 대충 보도자료를 보고 기사를 쓸 때도 잦고, 취재원을 닦달해 사진이나 보충 자료를 받아서 기사를 쓰기도 한다.
그러나 기자만 그러는 것은 아니다.
세상의 직장인들이여 양심에 손을 얹고 우리가 일하는 모든 시간을 온 정성과 마음을 쏟아 붓는다고 자부할 수 있는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4차 방중이 끝나고, 항상 옵션처럼 따라오는 김영철 부위원장 방중은 베이징 특파원들에게는 정말 죽을 만큼 힘든 숙제다.
스파이 출신인 김영철 부위원장은 항공권 예약 변경은 물론, 동선 변경, 부하와 동시 출몰 연막작전 등등 온갖 술수를 부리며 언론을 따돌린다.
아마도 스파이 생활이 몸에 밴 그에게는 취재진이 아프리카 초원의 얼룩말 등에 들러붙는 똥파리마냥 귀찮은 존재일 것이다.
국가의 운명을 결정할 굉장히 중요한 북미 고위급회담을 경건한 마음으로 준비하고 싶어하는 그의 심정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나 그의 이런 신출귀몰한 행동은 오히려 언론의 관심을 더 끄는 아이러니를 연출한다.
김영철 부위원장은 특히 나에게는 뼈아픈 패배감을 여러 차례 안겨준 취재원이다.
이번 취재 전까지 나의 김영철 부위원장 취재 성적은 4전 1승 3패.
사건기자로 잔뼈가 굵은 나에게는 굉장히 굴욕적인 수치다.
나는 웬만한 취재대상은 아주 손쉽게 뒤를 밟을 수도 있고, 그로부터 내가 원하는 정보를 캐낼 수도 있다.
이를 위해 때로는 취재원이 일하는 기관에 직원처럼 잠입하기도 하고, 그 건물 청소 아주머니에게 박카스를 들고 가서 조직의 속사정을 듣기도 하고, 안되면 취재원에게 술을 퍼먹여서 인사불성을 만든 뒤 취재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김영철이라는 양반은 애초에 나를 농락하듯이 가지고 놀았다.
내가 가장 먼저 당했던 것은 항공권 예약 변경이었다.
불과 30분 전에 멀쩡했던 항공권 예약이 금세 목적지가 뉴욕에서 워싱턴으로 바뀐다거나. 교묘하게 영문 이름의 알파벳을 바꿔서 예약한다거나 또 인원수를 부풀려서 예약하기도 했다.
정말 혼선에 복선을 더해 까는 책략으로 나를 골탕먹였다.
이번 베이징 경유도 이틀 먼저 들어온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의 이름을 워싱턴행 비행편의 예약자 명단에 넣으면서 헛발 기사 하나를 내보내게 했다.
골탕을 먹으면 먹을수록 나의 오기도 커지고, 꼭 잡고야 말겠다는 투지가 불탄다.
그러려면 필요한 것은 철저한 준비와 확실한 정보를 확보하는 것이다.
준비작업은 나 혼자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고, 나의 훌륭한 동료인 영혜와 숙연이가 확실히 뒷받침을 해줘야 한다.
이번 취재를 앞두고 나는 내 남은 임기에 김영철 부위원장이 다시 올 일, 그러니까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이 만날 일이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승부수를 던졌다.
중요 포인트는 모두 영혜에게 맡겼고, 루틴한 일은 숙연이에게 일임했다.
그럼 나는 무엇을 했느냐면 김영철 부위원장이 부릴만한 돌출 행동 시나리오를 파악하고, 그 길목 길목을 지켰다.
영혜는 1년 전보다 무척 많이 성장했고, 숙연이는 루틴한 일 정도는 껌으로 할 만큼 일이 손에 붙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는 정말 정교한 스위스 장인의 시계 톱니바퀴처럼 단톡방에서 대화 몇 마디 나눌 필요도 없이 착착착, 째깍째깍째깍 일을 처리해 나갔다.
그리고 김영철 부위원장은 '책략'을 펴는 곳마다 나를 만났다.
물론 그 만남을 위해 나는 두 배나 많은 발걸음을 하고, 잠을 확 줄여야 했다.
평소 2시간 전 공항에 나갔다면, 우리는 4시간 전에 공항에 나가 현장 분위기와 중국 공안의 동태를 미리미리 살폈다.
또 변동 사항은 미리 체크하면서 그의 동선을 완벽하게 파악했다. 심지어 베이징-서울 왕복 비행기 티켓까지 끊어서 해외 원정 취재를 나서기도 했으니 할 수 있는 것은 다 한 셈이다.
마침내 우리는 단독 기사를 쏟아냈다.
이 과정은 내가 베이징에 온 뒤로 가장 완벽한 팀워크로 만들어낸 것이었다. 세계적인 단독으로 꼽히는 김정은 4차 방중보다 훨씬 아름다웠고, 경이롭기까지 했다.
가수로 치면 BTS의 군무와 같다고 하면 딱 맞고, 스포츠로 치면 김연아의 프리 프로그램이라고 해도 좋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결과였다.
국내 언론사는 물론 해외 언론사까지 다 발라버린 김정은 4차 방중 단독 기사와 달리 이번 건은 비교적 '초라한' 성적을 냈다.
김영철 부위원장을 따라 워싱턴으로 갔던 교도통신 특파원이 가장 윗자리에 섰고, 우리는 그보다 한 칸 아래에 서야 했다.
너무 아쉬운 마음이 컸다.
고생해준 아이들의 얼굴이 떠올라서 조금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우리도 미국 가는 비행기 표를 샀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오늘 아침 내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때 이런 생각을 했다.
'그래 결과도 중요하지만, 과정도 중요한 거야. 우린 세계 최강이다'
사실 지금까지 저 소리가 개소리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솔직하게 저 고리타분한 중세 기독교 교리 같은 소리가 와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내가 겪어온 세상은 언제나 결과만을 봤다.
수능이 그랬고, 대학 학벌이 그랬고, 직장이라는 간판이 그랬다.
그 사람의 노력과 피땀은 항상 결과로만 평가받았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다. 잘 닦아진 '과정'이 숫자로 매겨진 '결과'를 앞설 수 있다는 생각을 조금은 갖게 됐다.
앞으로 나는 우리 비글들에게 자신 있게 이야기해 주려 한다.
네가 온전히 마음과 노력을 쏟아 부은 '과정'은 어떤 결과를 가져오든 정말 소중한 것이라고.
#단상 #결과보단과정 #우리는세계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