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번 가을이라는 계절을 앞둔 요즘. 어느 드라마에 흘러나오는 노래 한 곡에 푹 빠져버렸다. 봄마다 돌아오던 장범준이, 이제는 가을까지 접수하려나 보다.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네 샴푸향이 느껴진거야’
제목부터 참 오묘한 매력이 있다. 일단 흔해빠진 사랑 노래 제목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언제부턴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노랫말이 아니라 긴 제목으로 작사가의 마음을 전하는 이런 긴 제목이 마음에 자주 들어오곤 했다. 특별한 단어 하나 없이도 누군가의 솔직한 감정과 마음을 스토리텔링 하는데 확실한 강점이 있는 장범준의 자작곡이다. JTBC 드라마 <멜로가 체질>의 메인 OST로 등장하며 발라드 버전으로도 발매가 되었다. 오늘은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장범준의 노래 한 곡으로 들었던 인사이트가 떠올라 노트북을 열었다.
난 가수의 꿈을 꾸는 사람도, 내일 꾸게 될 사람도 아니다. 하지만 장범준이라는 사람이 왜 성공했고 사람들의 마음을 건드리는 부분이 어떻게 생겨나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비단 싱어송라이터만의 문제가 아니다. 작은 동네의 슈퍼마켓 사장님도, 내일의 실적을 걱정하는 영업 사원도, 몇 개월을 쏟아부은 기획안을 컨펌받아야 하는 회사원에게도 적용되는 고민일 수 있다.
화려한 수식어구, 완벽한 PPT, 청중의 혼을 쏙 빼놓는 발표 실력 등으로 포장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문제들이 일상에 많음을 이미 우리는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분야의 포인트를 극대화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누군가에게 온전히 전달되는 방식을 장범준은 보여주고 있으리라. ‘여수 밤바다’라는 노래 한 곡으로 한 도시의 예산을 송두리째 바꿔버린 그의 능력은 이를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스물다섯의 거리 위 버스커였던 그가 자신의 작곡 능력, 나아가 강점이었던 스토리텔링을 극대화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그가 마주했던 일상의 풍경과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던 천부적인 음감 때문이었을까. 아니라고 자신 있게 생각해본다. 그저 그는 무언가를 바라보고 기록하고, 들려주는 방식에 있어 타인의 정형화된 틀을 따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오랜 연애로 힘들어했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두려웠던 여주인공의 마음을 대변할 수 있는 노래를 떠올리게 된 장범준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특별할 것 하나 없는 평범한 길거리를 걸었겠지. 그러다 불어오는 바람에 아주 살짝 흔들리는 꽃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순간 흩날려 오는 샴푸향이 느껴졌나 보다. 그래서 다시 뒤를 뒤돌아보았지만 그냥 사람들만 보였다. 다 와 가는 집 근처에서 괜히 핸드폰을 만지며 한 번 연락해볼까 하는 마음도 들었다. 용기를 내보지만 그냥 마음만 아쉬운 여주인공이 생각났을지도 모르겠다. 꽃이 피는 어느 거리, 보고파지는 깊은 밤에 노랫말을 어렵지 않게 완성했으리라 감히 추측해본다.
JTBC <멜로가 체질>의 연출을 맡은 이병헌 감독(그 유명한 1600만 관객 영화 ‘극한직업’의 감독이기도)은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장범준에게 드라마 OST 작업을 직접 부탁했다는 그는, 완성된 노래를 듣는 첫 자리에서 완전히 빠졌다고 했다. 진행 중이었던 드라마 대사까지 노래에 맞춰 변경했고 그저 드라마 주인공들의 배경으로 깔리던 노래를, 드라마 에피소드 전면에 드러냈다. 효과는 굉장했다! 여주인공 천우희는 직접 기타를 들고 노래를 불렀다. 그녀와 극 중에서 연애를 시작한 안재홍과 만나는 설레는 순간에 어김없이 샴푸향을 찾는 이 매력적인 노래가 흘러나왔다. ‘나만 보는 게 아까운’ 이 드라마의 열혈 팬들은 드라마보다 OST가 더 유명한 상황 자체마저 즐기고 있다. 노래 한 곡의 힘이 이렇게 거대하고 누군가에게 영감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참 신기하면서도 멋지게 느껴졌다.
장범준의 개인 유튜브 채널에는 그의 가족과 함께 부른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네 샴푸향이 느껴진거야’의 새로운 버전이 업로드되었다. 노래 홍보를 위한 하나의 전략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뻔한 클리셰로 느껴지지 않았다. 이유는 원곡과 달라진 마지막 노랫말에 있었다.
'걷다가 보면 항상 이렇게 너를 아쉬워하다 너를 기다린다고 말할까
지금 집 앞에 계속 이렇게 너를 아쉬워하다 너를 연락했다 할까'
원곡의 마지막 부분 노랫말이다. 그의 가족과 함께 부른 버전에서는 마지막 문장이 바뀌었다. ‘연락했다 할까’가 아니라 ‘연락했다’로. 원곡에 대한 답가로서 노래가 완성된 느낌이다.
노래 한 곡이 불러온 내 생각은 이렇게 하나의 글로 쓰였다. 글의 분량이 짧아도, 길어도 상관이 없다. 글에 대한 부담이 사라진 내 모습이 그저 뿌듯할 뿐이다. 무엇을 써내야 할지, 어떤 멋진 표현과 단어가 있을지는 더 이상 내게 커다란 고민이 아니다.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도 누군가의 샴푸향을 느꼈던 장범준처럼, 나 또한 거리에서 들려오는 그의 노래를 듣고 무언가를 떠올리고 생각하게 된 걸로 그저 행복한 어느 주말 오후.
다시 돌아오는 가을과 새로운 월요일을 앞둔 지금.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들과 해내야 하는 것들에 대해 차분히 떠올려본다. 당장 아무거나 집어 들고 스토리텔링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지나치는 꽃들이 아닐지라도 지나치는 나의 어떠한 순간을 아쉽게 흘려보내고 싶지 않아졌다. 그 대상은 사람이 될지도, 결론이 나지 않는 지루한 회의가 될지도 모른다. 점점 비슷해지는 일상과 재밋거리 하나 없어지는 하루하루에 나만의 까닭을 만들고만 싶다. ‘요즘 뭐해? 별일 없고?’라는 질문에 신이 나서 대답할 수 있는 나만의 일상. 내일 점심에 뭐 먹을지 하는 고민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하루. 이렇게 하나의 생각과 글을 갈무리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