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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 인터뷰 | 나의 공간은 후각으로 형성돼요

소소한 물방울을 모아 파도를 만들어가는 이야기

12번째 물건 인터뷰이, 소소


—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


전 루틴으로 안정감을 갖는 사람이에요.  

힘들 때 벗어나기 위한, 집중하기 위한 일종의 프로세스가 정해져 있는 것 같아요.

그 프로세스를 더 충실히 즐기기 위해 루틴에 더 집중해요.


나의 물건을 소개합니다


Part 1. 인센스


- 요즘 내가 푹 빠진 물건: 인센스

나의 번아웃 루틴에서 빠지지 않는 물건이랍니다.
조금씩 사모으다 보니 저만의 인센스 취향이 생긴 것 같아요.
때에 따라 쓰는 인센스도 정해져 있답니다.
 
나의 세계에 휴식이 아스라이 들어가는 의식, 인센스예요.


— 각 때에 따라 어떤 인센스를 쓰는지 알 수 있을까요?

용도가 정말 확실히 나뉘어요. 진짜 힘들 때 쓰는 것과 힐링할 때 쓰는 것. 저는 개인적으로 공간을 향으로 기억하는 편이거든요. 아침에 여유롭고 싶을 때 대충 피워놓고 나가는 향이랑 사람들한테 방을 소개할 때 쓰는 향이 다 달라요.



— 내 공간을 나타내는 단어는 뭐가 있을까요?

저는 '아늑한', '오두막'이었으면 좋겠어요. 포근하고 혼자 있어도 아늑한 딱 그 정도. 다른 사람이 들어왔을 때 편안함을 느끼기 위해서는 아늑하고 살짝 달달해야 하거든요. 달달함이 느껴지는 공간이었으면 해요.


— 인센스 스틱을 언제 처음 접하게 되었나요?

홍대에서 처음 냄새를 맡았는데 좋았어요. 저는 충동구매를 굉장히 잘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인센스 홀더까지 냉큼 사버렸죠. 처음 피웠는데 생각보다 집 안에 있는 냄새가 잘 날아가는 거예요.

 

'기능적으로 좋구나, 우리 집 향기를 빠르게 바꿔줄 수 있겠다' 싶어서 조금씩 사 모으기 시작했어요. 이솝 매장을 제가 되게 좋아해요. 제일 좋아하는 브랜드인데 이솝에도 인센스가 있길래 맡아봤어요. 너무 좋은 거예요.


그때부터 제 휴식에 인센스가 쓰이기 시작했어요. 예전에는 방의 향기만을 바꾸는 기능적인 도구였다면 지금은 휴식을 위한 도구로 나아간거죠.



— 내 생활 속에서 인센스를 사용하는 패턴이 있나요?

아침 루틴에서 제일 먼저 쓰이는 건 탈취제. 탈취제를 뿌리고, 이불 걷고, 환기시키고 공기청정기를 제일 강하게 틀어두고 인센스를 켜요. 그러면 공기청정기는 난리가 나거든요. 그때부터 집 안의 향기가 바뀌면서 '아침이다'라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여유로울 때 가능하고요. 저녁에는 그냥 인센스만 켜두죠.



— 주변 친구들에게도 이런 차분한 루틴을 추천해 주셨나요?


추천해주기보단 보여줘요. 저희 집에 놀러 오는 친구들이 몇 명 있는데, 친구들한테 제 저녁 루틴을 그대로 보여줘요. 같이 요리해서 먹고, 친구한테 잘 맞는 차를 추천해주는 걸 너무 좋아하거든요.


— 건강한 삶을 향한 에너지가 엄청 확고해 보이는데요. 루틴과 관련해서 승희님한테 귀감이 돼준 사람이 있다면 누구였나요?


제일 답하기 힘든 질문 중 하나였는데요.

사실 루틴보다는 자신의 취미와 좋아하는 일을 잘하는 선배가 한 명 있었어요. 지금은 졸업하셨지만, 제가 대학에 처음 입학했을 때 학교 생활부터 시간표 짜는 방법까지 모든 걸 알려줬던 선배였는데 그분은 사진 찍는 걸 진짜 좋아하셨거든요.


사진을 좋아할 때 그냥 사진만 좋아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찍는지 공부하고, 출사를 다니고. 무언가 취미를 가지려면 취미에 대한 마땅한 지식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보여주신 분이라서,

그분을 보면서 내가 좋아하는 걸 그냥 하는 게 아니라

진지하게 받아들여서 힐링을 얻으면서 내 삶을 성장시켜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Part 2. 찻잔과 탈취제





- 나의 루틴에 쓰이는 물건: 찻잔과 탈취제

찻잔과 탈취제요. 루틴(routine)은 특정한 작업을 실행하기 위한 일련의 명령이라고 해요. 전 이 루틴을 크게 하나, 작게 하나로 나누어 보고 싶었어요. 크게 나의 성장에 집중한다면, 성장 과정에서 빠지지 않는 번아웃 루틴에 집중해보고 싶어요. 전 힘들거나 지칠 때 항상 차를 마셔요.

오히려 힘이 나거나 신이 날 때는 마시지 않는 편이에요. 힘들 때, 독서등만 키고, 좋아하는 뉴에이지 곡을 틀어놓고 차를 다도에 맞게 우려서 즐기며 책을 읽으며 힐링을 하고 있어요. 그렇게 잠시 숨을 돌리다 보면 번아웃에서 조금은 회복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이게 제 번아웃 루틴이에요! 작은 범위에서 보자면 의미 있는 하루를 만들기 위한 루틴은 항상 탈취제가 빠질 수 없어요! 아침에 항상 피로와 나른함을 그대로 담은 침구에 편백탈취제를 뿌려서 없애고 있어요.

정리하면, 나에게 지금은 잠시 한숨을 돌리는 시간임을 알리는 일종의 의식, 찻잔. 어젯밤의 피로를 없애고, 하루의 시작을 여는 편백탈취제


— 찻잔이 엄청 많네요. 혹시 다도를 배운 적 있으신가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웹툰이 있어요. 이름이 ‘차차차’인데...

그걸 보다가 푹 빠져서 중학생 때부터 차를 좋아하기 시작했어요. 또, 중학교 2학년 때 항상 루이보스티를 보온병에 싸와서 건네주는 친구가 있었거든요. 웹툰과 친구 덕분에 차를 점점 좋아하게 되었구요.


고등학교 1학년 때 찻잔 세트를 사서 원데이 클래스를 진행하고, 그걸 갖게 됐는데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차를 도구로 하게 됐어요. 클래스 준비하면서 인터넷으로 본 걸 따라해보긴 했지만

결론적으로 다도를 따로 배웠던 건 아니에요.


— 차를 한 번 내리는 데에 이렇게 많은 도구가 필요한 줄 몰랐어요.

사실 차라는 건 '맛'이 없잖아요, 다른 음료들에 비해서.

그래서 그 '과정들'을 꼭 즐겨줘야 되거든요.

처음에 물을 끓이고 거르고, 또다시 옮기고 농도를 조절하고 이런 작업들이

내가 지금 휴식을 취하고 있다는 신호가 되고 그 과정에서 힐링을 얻는 거 같아요.

저는 차 마시는 시간이 긴 편인데, 식으면 맛이 없더라고요.

그치만 갓 담은 차도 맛이 없어요.


살짝 따뜻해지는 온도에서 맛있어지거든요. 그 과정에서 꼭 필요한 도구들이에요.



— 차를 마실 때도 적정 시간이 있나 봐요. 무조건 뜨거울 때 마셔야 맛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저도 그런 줄 알았는데 한번 심심해서 온도별로 다 테스트를 해봤거든요.

온도별로 물 양도 조절해보고, 차 양도 조절해보고.

조금 더 우려야 더 맛있는 게 녹차예요. 저는 또 녹차를 좋아해서.


— 이 도구들은 어떻게 알게 된 거예요?

'두레차'라고 제가 좋아하는 홍대 찻집이 있어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친구랑 항상 시험 끝나면 가는데 그곳에서 하나 둘 들여왔어요.

대부분 '두레차'에서 구매한 거예요.


— 사실 차에도 카페인이 들어있잖아요. 소소님은 카페인에 강한 편이신가요?

저는 원래 커피도 좋아해서 괜찮았어요. 차를 마셔서 잠이 안 온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근데 제가 홍차를 못 마시기 때문에 주로 동양차를 마셔요. 떫은맛을 잘 못 먹더라고요.

홍차는 동양차에 비해서 떫은맛이 심해서 집에 쌓여 있어요. (웃음)


— 힘이 나거나 신날 때는 차를 마시지 않는 이유가 있나요? 가라앉을 때 떠오르기 위한 목적으로 차를 마시는지 궁금해요.


제가 너무 지친 날에는 집에 가면서 '오늘 너무 힘들다. 쉬어야겠다. 그리고 차를 마셔야겠다' 마음을 먹어요. 그럼 그날이 차를 마시는 날이 되는 거예요.


굳이 신나는 날에 '오늘 차 마셔야지!' 하고 마시기보다는 오늘 너무 힘드니까 치유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마시는 것 같아요.


— 그러면 보통 오전보다는 일과를 끝내고 지친 오후에 차를 마시는 편인가요?

네 맞아요. 아침엔 무조건 커피


— 차는 보통 따뜻하게 마시잖아요. 찬 것보다 뜨거운 음료를 더 좋아하시나요?


아뇨, 커피는 무조건 아이스 아메리카노.

차에 있어서도 아이스가 더 어울리는 차가 있긴 해요. 근데 오히려 그게 더 번거로워요.

냉침을 하려면 오래 잘 담아둬야 되기 때문에.



— 말씀해주신 것처럼 차의 '맛'은 다른 음료보다 옅은 편이잖아요.

그 '차'들의 미세한 차이를 잘 감지하는 편이에요?


네, 차이가 분명한 것 같아요. 다른 차들도 다 그렇긴 한데 특히 중국차.

특히 녹차는 오설록이 왜 대중적인 브랜드인지 알 수 있을 만큼 고소하고 달달함이 강하고, 

쌍계 쪽은 되게 연하고 편하게 마실 수 있어요. 저는 아름드리를 좋아하거든요. 

제가 처음 마신 녹차가 아름드리였는데, 그게 저에게 제일 녹차스러워서 가장 좋아해요. 가장 평균값을 유지하고 있달까요.


조금 더 진하고 연하고, 차마다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최근엔 녹차도 중국에서 수입한 차들을 구매해서 마시고 있어요.


— 보울에 얼음을 띄워서 흔들어 마시는 맛있는 말차를 마셔본 적이 있어요. 

그때 처음으로 ‘말차가 이 맛이구나’ 느꼈거든요.


다들 차를 안 마셔봐서 차가 맛없다고 하는데

차를 마시면 입에 머금고 있을 때 원래 '흥'해줘야 되거든요.

코로 이렇게 흥 해줘야 맛이 나는데, 그냥 벌컥벌컥 마시면 그 맛을 알 수 없어요.




— 인센스부터 차, 탈취제까지.

이런 소소한 취향들이 자연스럽게 루틴이 된 건가요?


저는 원래 체계가 안 잡혀 있으면 스트레스를 받는 편이에요.

아침에 일어났을 때 할 일이 정해져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그 시작이 탈취제였던 것 같아요.

그냥 아침에 일어나서 뿌리고 이불 정리하고 인센스를 켜놓고 씻으러 가는 루틴이 생겼어요.


문이 열려 있을 때 인센스 향이 덮이고, 침대도 깨끗해지면 평화롭게 씻으러 들어가거든요.

계속하다 보니까 너무 익숙해져서 이제 안 뿌리면 찝찝할 것 같은 느낌?


— 보통 하루의 시작을 탈취제로 열고 마무리를 차로 닫는 것 같아요.

기상 직후에는 탈취제, 수면 직전에는 차를 마시니까요.


맞아요. 탈취제로 하루를 깨끗하게 열고, 잘 때는 얌전히 따뜻하고 아늑하게 자고.




Part 3. 빔프로젝터


- 가장 마음에 들었던 선물: 빔 프로젝터

집순이인 나에게 집을 더 아늑하게 만들어준, 가장 친한 친구가 선물한 빔 프로젝터
닌텐도를 하거나, 영화를 볼 때, 책을 읽을 때 그 세계를 제 방에 그대로 펼쳐놓을 수 있어요.
 
제가 집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너무도 잘 아는 친구가 주었다 보니,
제 힐링에 아주 딱인 선물이랍니다 :)


— 책을 읽을 때 빔 프로젝터를 어떤 식으로 활용하는 건가요?

약간 배경 음악을 깔아놓는데 예를 들어 그 책마다의 분위기가 있잖아요.

그 분위기에 맞는 영상을 제 벽 옆에다 깔아둬요.


— 진짜 환경 설정을 잘하시네요.

맞아요, 환경 설정. '나 지금 쉬고 있다. 여기는 무릉도원이야'하면서 세팅해놓고 즐기려고 이걸 쓰는 거예요. 근데 빔 프로젝터는 용도가 되게 다양해요. 요즘 제일 많이 쓴 건 '닌텐도'. 친구랑 침대에 앉아서 바로 맞은편 벽에다 쏘고 같이 게임을 하는데 크게 즐길 수 있어서 좋아요.


— 나 자신을 위한 행동을 꾸준히 이어나가는 소소님에게도 정말 귀찮은 게 있다면?

이것도 참 어려웠던 질문이에요. 좀 다른 식으로 생각해 봤는데 저는 오히려 그런 루틴들이 깨질 때

비로소 '나 지금 거지같이 살고 있구나' 판단하거든요. 예를 들어 아침인데 탈취제를 안 뿌리고 그냥 씻고 뛰쳐나갈 때 내가 요즘 계획 없이 삶을 그냥 멍청하게 보내고 있구나 깨닫는 것 같아요.


그게 제 판별 기준이 되는 것 같아요.




— 루틴들이 귀찮아지기 시작하면 무언가 문제가 있는거군요. 오래전부터 그런 습관을 유지를 해오신 것 같아서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궁금했어요.


체계화가 안 돼있으면 스트레스를 받으니까 힘들 때 밤 또는 아침에 할 일을 정해놓고 와다다다 해버리는데 그럴 때 저는 좀 쾌락을 느껴요.

"잘 살고 있어, 정리 정돈되고 있어" 하면서 약간의 편안함도 느끼고. 그러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루틴화가 되었고, 그게 하루 일상이 되었어요.


하루만 안 해도 바로 느껴지잖아요, 맨날 하던 거니까. 그때는 '나 요즘 왜 이렇게 쓰레기처럼 살고 있지, 정신 차려' 하면서 다시 하는거죠.




— 한 때 빔프로젝터로 화면을 방 안 가득 채우고 영화를 봤던 적이 있어요. 그런 낭만들이 제 삶을 한 단계 더 즐겁게 만들어줬는데, 소소님도 빔프로젝터로 봤던 인상 깊은 영화가 있나요?



좋아하는 영화는,

혼자 있을 때는 신카이 마코토 감독 영화를 계속 틀어놔요. 그게 아니면 디즈니의 몬스터 주식회사.


처음 봤던 인상 깊었던 영화는 '날씨의 아이', 그걸 빔프로젝터로 봤었어요.


— 애니메이션을 좋아하시는 편이네요. 신카이 마코토 감독님을 좋아하는 이유가 있어요?


신카이 마코토 감독님의 영화는 새로운 세계에 왔다,

새로운 공간에서 그 영화를 보고 있다고 느끼게 해줬던 것 같아요.


조금 다르긴 하지만 인터스텔라를 만든 크리스토프 놀란 감독님의 영화나,

라라랜드나 위대한 쇼맨도 그런 느낌이구요.

내가 그 세계에 들어왔다는 느낌을 주는 영화를 좋아해요.



— 빔프로젝트가 TV처럼 리모컨 하나로 쉽게 켜지는 건 아니잖아요. 위치도 잡아야 하고, 소리도 조절해야 하고. 귀차니즘이 심한 편이라서 저는 빔 프로젝터를 사지 못해요.


맞아요, 그래서 "진짜 나 쉬어야 돼" 할 때 주섬주섬 꺼내서 연결하고, 주섬주섬 인센스 켜고.

그런 작업과 과정들이 저에게 '나 쉬고 있어. 쉬고 있는 중이야' 하고 알려주는 신호인 것 같아요.


— 이런 과정을 즐기는군요. 시간이 걸리는 준비 과정 자체를 '내가 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신호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즐길 수 있는 것 같아요.


맞아요. 그리고 사실 그냥 이걸 들어올리면 누워서도 볼 수 있어요. 그래서 항상 누워서 봐요.

정말 시체처럼 볼 수 있거든요. (웃음) 예약 걸어놓고 자고 일어나면 항상 꺼져 있어요.




— 물건의 사연을 듣고 소소님에 대한 질문을 더 적어왔는데요. 닉네임이 왜 소소인지 궁금했어요.


제 인스타명이 sosohan이에요. 

'소소한 하루, 소소한 선물, 소소한 행복'처럼 '소소한'이라는 말은 긍정적이면서 조금 더 이야기를 담는 느낌?

그래서 '소소하게'라는 단어를 좋아했어요. 마침 제 영어 이름이 sue인데, 그 이름이랑 엮다보니 soso가 된 것 같아요. 요즘은 저를 소소나 소소한이라고 불러주는 사람이 많아진 걸 느껴요.



— 아까 인터뷰 중에 '소소한 루틴'하고 발음하실 때 '소소' 라는 단어가 참 어울리더라고요.

고요한 시간으로 빠져들게 하는 물건을 많이 가져왔는데, 혼자 있을 때 더 만족감을 느끼는 편인가요?


저는 극 I이기 때문에 혼자 있을 때 에너지를 받아요.

약간 저한테는 스스로 쉬는 시간이라는 걸 각인시키는 게 굉장히 중요하고

그 시간 자체에서 엄청난 위로를 받고 있어요.


빔 프로젝터 켜놓고 인센스 향을 맡으면서 잡지를 읽는 걸 좋아하거든요.

익숙한 걸 하면서 소소하게 흘러가는 일상이 좋아요.


— 혼자 있을 때 나의 시간은 느긋하고 소소하지만 밖에서의 시간은 되게 치열하게 보내시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집에서의 시간을 편안함으로 가득 채우려는 걸까요?

집에서는 절대 뭘 하려고 하지 않고 쉬려고만 해요.

'쉴 때 뭐 해? 취미가 뭐야?' 물어보면 저는 항상 잠이라고 대답했거든요.


그치만 취미가 잠인 건 좀 슬프잖아요.

저에겐 다른 휴식수단이 필요했고, 그걸 이런 루틴들로 마련해놓은 것 같아요.




— 저도 잠을 진짜 좋아하거든요. 잠을 못 자면 우울해져요. 대체로 오감에 관련된 물건을 들고 오셨는데 어떤 감각이 나에게 제일 중요한가요?


굳이 하나 고르자면 후각이에요.

제가 미셸 푸코의 '헤테로토피아'라는 개념을 되게 좋아해요. 예를 들어 지금 이 식탁 아래는 저희에겐 그냥 '식탁 아래'지만 5살 친구들한테 식탁 아래는 무엇일 것 같으세요?


— 쉘터 같은 느낌 아니에요?

맞아요 이불을 감싸면 텐트가 되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그 아이의 아지트잖아요. 그냥 단순하고 일반적인 공간이 개인에게는 굉장히 추억이 깃든 하나의 공간으로 성립되는 걸 좋아하거든요.


저는 '그 공간'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공간은 후각으로 형성된다고 생각해요. 후각만큼 기억을 오래 가져다주는 게 없기 때문이에요. 제가 무조건 인센스를 켜야만 쉰다고 느끼는 것처럼요.




— 인센스가 쉼의 전제로 단단히 각인이 되어있네요.

유토피아는 공간이 없고 실체가 없는 이상향이잖아요. 근데 헤테로토피아는 실체가 있어요.


— 나의 헤테로토피아를 완성해준 이 물건들이 내 방에서 사라진다면 어떨 것 같나요?

이 물건들이 사라진다면 제 휴식이 사라질 것 같아요.


— 근데 또 다른 방법을 찾지 않을까요?

제가 생각보다 새로운 도전을 안 좋아해요, 맨날 같은 음료만 시켜 먹고.

안정된 기반이 있어야 새로운 걸 도전해보는 편이에요.


— 오늘 인터뷰에서 '상처받거나', '지쳤을 때' 이런 류의 단어가 많이 나왔는데

그런 감정에 민감하고 예민한 편인가요?


제가 항상 말하는데, 제 장점이자 단점이 '제 상태를 모른다'는 거예요.

고등학교 때부터 저는 절대 제 상태를 안 믿었어요.


힘들고 피곤해도 스스로에게 '힘들다고 핑계대지마' 하면서 스스로를 다그쳤거든요.

제 상태를 잘 모르니까 이 정도면 괜찮은 거 아닐까 하다가 나중에 터지는 편인데,

그래서 루틴으로나마 스스로에게 쉼을 각인시키는 거예요.





— 밖에서도 실행하는 루틴이 있나요?

제가 힘들면 터진다고 했잖아요. 멘탈이 터질 때의 루틴이 있어요. 저는 터지면 무조건 떠나더라고요.


새벽에 제일 느린 기차를 타고. 오래 걸리면서 자연경관을 볼 수 있는 무궁화호를 타고, 도착하면 아무렇게나 돌아다니다가 꼭 바다가 보이는 등대 앞에서 소리를 질러요.


근데 사람 있으면 안 돼요. 사람 없는 곳을 찾았어요. 동해입니다. 강릉 안 돼요. 그리고 꼭 바다 앞에서 병으로 된 맥주를 마셔요.


그리고 돌아올 때도 그 무궁화호 안에서 항상 헤르만 헤세 책을 읽어야 해요.





— 헤르만 헤세 책은 왜요? 

성장통을 다룬 이야기라서 그런가요?

맞아요. 헤르만 헤세 책은 소년들의 자아에 관한 고민과 사람을 마주했을 때의 고민들이 다 적혀 있어요.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고등학교 때 읽었을 때랑 지금 읽을 때 다르게 읽히거든요.

지금 읽어두면 나중에 다시 읽을 때 내가 생각이 달라졌다는 걸 알 수 있잖아요.

그래서 지금 읽어놔야 돼요. 저는 제가 힘들 때 읽었으면 좋겠어요.



— 마지막으로 이 인터뷰를 읽고 사람들이 당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면 좋겠나요?

이제 막 친해지신 분이 저를 항상 '소소한님'이라고 부르는데 딱 그렇게 기억됐으면 좋겠어요.

소소하게 일상을 꾸려나가면서 소소하게 힐링을 하고, 그 소소한 걸로 거대한 무언가를 만들어나가는.

그냥 차를 마시는 작업 하나뿐인데 그 소소한 일상이 모여서 습관이 된 그런 사람의 이야기요.


— 인터뷰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고생하셨어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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