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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안 Nov 05. 2024

마누울. 나 나무하러 간다!

녹슨 리어커. 낡은 등산화.허름한 옷.그리고 전동톱

가을이 깊어지고 찬바람이 일기 시작하면

남편은 월동 준비태세를 갖추느라

근처 오름밑이나 귤밭 방품림 벌목해 둔 곳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


나무하러 간다.

 문장에는 시골냄새가 제대로 담겨있으며

자연 안에 들어와 살고있는

지금 우리 삶을 증명하느낌이다.


남편은 바쁜 일상 중에도

가을 풀숲에 들풀들이 사그라 들고

그 풀덤불 속에 있을지도 모르는 독사들이

겨울잠을 자기 위해 땅속 어딘가로 들어가기 시작할 무렵이 되면,

어김없이 전동 기계톱을 들고 허름한 일복차림으로 등산화를 신고서 양손에는 장갑을 끼고

나무를 하러 숲 속 어딘가를 향해 집을 나섰.



우리가 제주로 이사와 세 들어 살던 그 집은 쓸데없이 크고 넓어서 가족이 사용하는 공간보다

사용하지 않는 공간이 더 많았다.

난방비를 아낀답시고

사용하지 않는 방문은 닫고 그쪽으로 지나가는 보일러 파이프 밸브를 잠그고 지냈는데

그러다 보니 집은 늘 냉기가 돌았고 습하고 너무 추웠다.


겨울에 제주로 이사와

겉만 번지르르하고 과하게 덩치만 큰 집에서

겨울 초입에 딱 한 달을 보내보니

실내에 포근한 공기라곤 이라곤

개뿔도 없었다.


제주 겨울 날씨에 적응도 하기 전이거니와

시골 단독주택에서 겨울을 나본적 없던 우리는

서울 아파트에서 살 때의 포근한 실내 온도를 생각하며 겁도 없이 기름보일러를

주구장창 돌려댔다.


그렇게 딱 한 달이 지났을 때

그 달에 난방으로 들어간 기름값을 따져보니

백만 원이 훌쩍 넘게 들어간 걸 알고는 그야말로 입이 떡 벌어졌다.

그렇게 비용을 들이고도 난방 효과가 있었으면 다행이었겠지만 말했다시피

집이 너무 과하게 크고 구조가 효율적이지 못한 고로 그 비용을 치르고도

여전히 우리는 실내에서 벌벌 떨면서

두 겹 세 겹 옷을 겹쳐 입어야 했다.



우린 난방을 위해 대안법을 고민해야 했다.

아파트 살 때 포근함 따위는 빨리 잊는 게

신상에 좋았다.

우선 가족들은 북한 시골 사람들처럼 

옷들을 몇 겹 씩 껴입고서도 실내에서 움직일 땐 패딩조끼를 걸쳐야 했고 두꺼운 양말을 신고 털 슬리퍼를 신었다.


 다음은 거실에 화목 난로를 들여놓았다.

서울 촌 놈들이라 화목 난로 사용도 처음이니

처음엔 난로의 용량이나 기능을 고려하지 못하고 단지 겉모습이 예쁜 주물 난로라는 이유로

거실에 설치했었다.


얼어 죽을 그 주물난로는 난방용이 아니라

장식용에 가까웠는데 난로가 워낙 작아서

장작개비 세 개 넣으면 딱 맞았다.

난로를 설치를 하고 연통을 세워 장작을 때보니

용량이 집 평수에 비해 열기가 턱없이 부족해 얼마가지 않아 장난감 같던(그러나 오지게 비쌌던) 주물 난로는 미련 없이 철거됐다.


나는 당시 우리 집 아이들이 좋아하던

뽀로로 만화 같이 보고 있다가

뽀로로네 집 벽면에 있던 반원 화덕을 보고는

앗. 저거다! 싶어서 직접 내 손으로 공들여

돌멩이와 흙으로 반원모양 흙난로를 만든 적도 있다.


로로네 집 화덕은 거기 사는 동물이 뽀로로니까 그 화덕으로도 눈 속에서도 잘 버텼는지는

몰라도 덩치 큰 사람인 우리에게는 도통 도움이 안 된 물건이었다.

 난로 만들 때 사용된 흙은

열전달측면에서 역시나 효율성이 떨어졌다.


마침내 우린 여러 시행착오 끝에

겨울철 시골 식당엔 어디든 있는 아주 대빵 커다란 철제 난로를 거실에 들이기에 이르렀다.

역시 동네 사람들이 난로를 쓰는덴

다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철로 만든 것이어서 열전달률이 좋았다.

일단 크기가 커서 한 번에 장작 대여섯 개를 넣어두면 거실이 후끈후끈하고 ㄱ자로 꺾어져 창문으로 빠져나가는 연통 역시 지글지글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난로에 넣을 나무는 오로지 남편 몫이었다.

오름주인에게 허락을 받은 후에

오름에서 죽은 나무를 대충 전기톱으로

숭덩숭덩 덩이채 자른 후 날라다가

그것을 도끼질을 하여 4등분 혹은 6 등분하여 난로에 들어가기 적당하게 자르고서

한편에 차곡차곡 쌓아 말렸다.


오름에 있는 죽은 삼나무를 작업해 오거나

귤밭 방풍림을 자른 삼나무들을

남편이 기계톱으로 위잉 소리를 내며 약 1미터 간격으로 커다랗게 잘라놓으면

트럭이나 리어카 있는 부분까지 끙차 끙차

기를 쓰고 끌고 나와서 차에 실었다.

 

차에 실을 공간은 몇 개 싣지 않아도 금세 꽈악 차기 일수여서 남편은 마당에 그 나무들을 우르르 부려 놓고는 다시 나무가 쓰러져있는 곳으로 가서 나무를 해왔다.


도시에서 살 때 거친일이라고는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남편은 용케도 나무하는 일에 점점 재미를 붙이더니 일하는 노하우가 쌓여

이제는 여느 시골 사람 못지않게

수월하게 일들을 해낸다.


그렇게 해온 나무를 말리고 도끼로 장작을 패서 난로에 불을 지피우면 냉했던 집안 공기의 온기가 슬슬 살아나니 가족 모두가 행복했다.

남편은 가족들을 따뜻하게 해 줬다는 생각에

매번 나무를 하는 힘든 과정의 고단함 쯤이야

금세 위안을 받았다.


그렇게 산더미 같이 쌓인 나무도

추운 겨울이 되면 어느새 푹푹 줄어들었다.

나무가 다 떨어져 갈 때쯤엔

연탄으로 난방하는 집 사람들이

줄어드는 연탄을 보며 걱정하듯이

우리 역시 어찌 또 냉랭한 공기와 싸울 것인가를 미리부터 고민했다.



몇 년간 나도 남편과 함께 남편이 나무하는 곳을 따라다녔다.

자른 나무를 차있는 곳까지 실어주는 것을 돕거나

기계톱으로 자를 통나무 잔가지들을 미리 부러 뜨려 정리해 주며 남편을 거들어 주었다.

그러고 나면 늘 그날 저녁엔

영락없이 자리에서 앓아누워서 끙끙거렸다.


남편은 그럴때마다 그렇게 말했다.

렇게 너를 데리고 다니다가는 약값이 더 들겠네. 남편은 그렇게 우스갯 소리를 하며

나무하러 갈 땐 나를 따라오지 못하게 했다.


다행히 지인분도 기름과 나무를 연료로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화목보일러쓰셔서

우리처럼 나무가 필요하니

남편은 그분과 종종 한 팀이 되어서 나무를 하러 다녔다.


덕분에 내가 덜 미안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난 난로에 나무를 하나하나 넣을 때마다

힘들게 남편나무를 해와 쓰기 좋게 잘라준

땔감의 소중함을 느끼게 되니

남편이 고마웠다.



제주살이 해가 거듭되어

지금 집으로 이사를 왔다.

집은 우리가 지내기 적당한 크기의 작은 집이고 옛날 시골집이라 기본적으로 항상 아늑했다.


몇 년간 시골살이 노하우가 쌓인 우리는

영리하게도 냉큼 보일러를 화목보일러로 바꿔서 땔감과 기름을 번갈아 사용했는데

땔감 몇 개만 넣고 불을 지펴도 작은 우리 집은

금세 포근해졌다.


친한 지인들 역시 시골분들이라

화목보일러를 쓰는 우리 집 땔감 사정을 아시고 우리를 챙겨주시기 바빴다.

벌목되어 버려진 삼나무나

귤밭 가지치가 끝난 밭에 귤나무가 쌓여있을 때

땔감 나무가 보이는 대로 이건 ㅇㅇ네 집에 가져다주어야겠다. 든가

이거 ㅇㅇ이 아빠한테 가져가라고 말해야겠다 하면서 땔감 나무가 잔뜩 있는 곳을

남편에게 일러 주시기도 다.


언젠가는 아침나절부터 지인분과 나무를 하러 나간 남편은 밤이 다돼서야 기진맥진이 되어 돌아왔다.

나무를 실어 나를 트럭이 중간에 퍼져버려 그

숲 속에서 아주 죽을 고생을 한 모양이었다.


숲 속에서 나무하느라 지친 남편은

저녁식사를 마치고 화목보일러에

나무를 태워서 데운 물로 아이들과 샤워를 했다.

더위는 잘 참아도 유독 추위를 많이 내가

춥다 춥다 하니

남편은 다시 마당구석으로 나가

리어카에 나무를 실어와서 적당한 크기로  자르고는 난로에 꼭꼭 나무를 집어넣고

집안을 뜨뜻하게 데워주었다.

그러니 내가 어찌 남편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남편은 나무하는 일은 힘들지만 그것 또한

묘하게 중독인 거 같다고 했다.

당시 학원 일로 바빴던 남편은

나무를 할 때 육체로 하는 노동이

가끔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잊을 만한 비법인양 생각한 듯했다.

도끼질을 할 때 쩍쩍 갈라지는 통나무를 보면 쾌감이 인다고 다.


가끔 서울에서 친한 지인들이 놀러 오면

남편은 일부러 나무하러 가는 길에 데려가거나 도끼질을 해보라 하면서 도끼를 건네기도 .


도시에서 정신없이 살면서 머리가 복잡해지거나

쉬고 싶을 때 그들은 종종 우리를 찾아왔다.

좋다는 제주 관광지들은 갈 생각조차 없는지

그들은 남편이 나무하러 가는 길에 동행했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삐뚤 빠뚤 나무를 쪼개며

남편에게 배운 도끼질을 했다.


처음엔 서툴게 도끼질을 하던 서울사람들은

이내 그것이 익숙해지면 점점 남편이 나에게 말했던 도끼질의 쾌감을 느끼는 듯했다.

나중에 우리 집에 다시 올 때는

땔감 도끼질 해줄까? 너네 나무할 거 없니? 하면서 먼저 묻기도 했다. 어설펐지만 그들도 나무하는일에 중독이 됐던 모양이다.


도시 생활이라는 것이 다 거기서 거기여서

회색 건물들 사이를 종종걸음으로 바쁘게 다니며 먹고 사느라 바쁜 일상들이다.

가끔 머리 식히러 여길 찾아왔다는 지인들은

우리 집 거실에 마주 앉아 따뜻한 차를 내려 마시며 이야기를 나눌 때, 생활하면서 느끼는 정신적인 시달림이나 스트레스를 항상 얘기했었다.


남편 경험에 비춰보면

그럴 땐 자연 한 자락 속으로 들어가

나무를 해보고 도끼질도 해보면서 땔감을 만들어 내는 단순한 육체노동을 경험해 보는 것이

그들이 겪는 정신적인 어려움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었나 보다.

아마 그런 이유로

남편은 서울 친한 지인들을 데리고 나무를 하러 나가거나 일부러 도끼질도 시켜본 모양이었다.



가을이 오는가 싶더니

가을을 느낄 새도 없이

제주는 이미 초겨울로 접어드는지

새벽과 저녁 바람에서 냉기를 느낀다.

근처 오름에 나뭇잎들이 색이 바래며

냉기를 품은 바람에 날아드니 단풍도 오기 전에

겨울로 진입하는가 싶다.


딱 이맘때쯤이 되면 리어카에 전동 톱을 싣고

낣은 등산화를 신고 허름한 옷차림을 하고서

집 옆 오름밑으로 나무하러 나가던 남편모습이 떠오른다. 지금은 말들 데리고 사느라 바빠서

땔감 나무를 마련하고 도끼질할 새도 없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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