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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안 Dec 09. 2024

고사리 따며 초원을 기었고 고사리 찾느라 마당을 기었다

고사리는 고사리 꺾는 시기를 놓치면

고사리 손이 피어버리고 억세 져서

나물로 먹을 수 없다.

더 늦으면 고사리를 꺾지 못하기에

고사리 장마가 그친 봄날에

나는 올해 마지막 고사리를 꺾었다.


제주 할망들사이에서

고사리가 많은 고사리 존은

며느리한테도 안 가르쳐준다는 말이 있다.

나는 고사리 밭이 어디냐고

동네 할망들에게 물을 필요가 없다.


봄철이 되면

집 뒤에 있는 십만 평 초원이

온통 고사리 밭이니 말이다.

완전 무장하고 모자 쓰고 고사리 담을

가방 하나 들고 가면 된다.


고사리도 크고 굵은 실한 고사리가 있고

빼짝 마르고 짤막한 못생긴 고사리가 있다.

처음에 고사리 초짜들은 고사리만 보면

실하던지 말랐던지 일단 다 딴다.


그러나 고사리 꺾는 년수가 찰수록

30센티정도 길이에 굵고 실한 것이

진짜 고사리지. 하며 그런 것만 딴다.

그렇게 실한 고사리들은

가시덤불 속이나 풀들로 그늘진 음흉한 곳에서 꼿꼿하게 자란다.

그런 것들은 나중에 말려도 실하고

다시 불려서 요리해서 먹을 때도 연하고 부드럽다.



오름 밑자락 드넓은 초원 풀숲 덤불을 뒤지며

그날 고사리를 꺾어 모을 때

내 주위에는 오직 적막뿐이었다.

가끔씩 내 발길에 놀란 어떤 생명들이

급히 부스럭거리며 몸을 숨기는 소리.

바람에 나뭇잎이 사그락 흔들리는 소리만 들려왔다.


저만치 덤불 너머에서

무언가 큰 소리를 내며 다가오길래

난 진짜 화들짝 놀랐는데

조금 있으려니 커다란 황소 3마리가

나란히 줄을 지어

내가 있는 곳으로 거만하게 다가왔다.


초원에서 풀을 뜯던 소들은

풀숲에서 웅크린 채 고사리를 따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자기들도 깜짝 놀랐는지

입에 남은 풀을 잘근잘근 씹다가 멈추더니

큰 눈이 더 땡그래졌다.

세 놈은 줄지어 서서 나를 빤히 내려다봤다.


나는 고사리를 꺾다가 녀석들에게 말했다.

소들아 안녕?

지금 뭐 하냐고?

으응. 나 고사리 꺾어.

너네는 고사리 안 먹지? 근데 나는 먹는다?!

고사리는 독이 있어서 먹으면 죽는다고?

나는 고사리 먹어도 안 죽는다?!

나 멋지지!

소들이 내 말을 알아듣는 건지 어쩐지 관심 없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던 소들에게 혼잣말을 했다.


내가 부지런히 고사리를 꺾으며 시렁거리자

녀석들은 내가 고사리 꺾는 것을 한참 구경하더니

관심이 다 떨어졌는지 고개를 돌렸다.

야. 저 인간 머리가 좀 이상한가 봐!

풀이나 뜯으러 가자. 하듯이

우웅 한숨을 길게 내뱉고 가던 길로 향했다.


그날 내가 고사리를 꺾으며

초원에서 만난 생명들은

거대한 황소 3마리.

덤불 위에서 일광욕을 하고 있던

쬐끄만한 도마뱀 한 마리

그리고 무수한 송충이들이 전부였다.

나는 소 3마리와 도마뱀 한 마리와

무수한 송충이들과 친구 하며

올해 마지막 고사리를 땄다.


가시덤불 속에 실한 고사리를 따려고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서

가시덤불 깊숙하게 손을 넣어 상처를 입어가며

초원을 뽈뽈뽈뽈 기어 다니면서

고사리를 하나씩 따 모았다.


그날 고사리들이 보이는 족족 따서 모으니

등산 배낭 2/3 가량 채웠고

집에 와 마당 데크에 부려놓으니 양이 제법 되었다.


시멘트 블록을 양쪽으로 두 개씩 세우고

양은솥을 걸어둔 임시 아궁이에

잔가지들을 모아 불을 피워 팔팔 물을 끓인 다음,

고사리를 집어넣고 데쳐서 건져 올렸다.


구멍이 숭숭 뚫린 채 바구니에 건져 올리고서

마당 데크 테이블 위에 놓고 며칠 말리고 보니

고사리는 볕에 바싹 말랐다.

 많던 것들이 겨우 주먹 한 줌으로

양이 확 줄어버렸다.


일 년 동안 두고두고 먹을 고사리인지라

며칠 더 바싹 말릴 작정 하고서

고사리가 담긴 플라스틱 바구니를

데크 위에 놓아두었다.


깊은 잠에서  깨어보니

새벽 네시반.

잠시 정신을 차린 후에

거실에 멍하니  앉아있다 보니

창밖에 부는 바람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마당 데크  한구석

종이 박스에 담아둔

재활용 플라스틱 생수병이

쉭!쉭!부는 바람에 날아가 데크를 굴러갔다.


우당  우당  더그르르륵 텅텅.

아!

맞다!

데크 테이블 위에

말린 고사리 담아둔 내 바구니!


섬광처럼 빛을 내며

땡볕 대낮

빠삭 빠삭 말린

고사리가 번뜩 생각이 났다.


거실 유리창 열고

후다다닥 뛰쳐나갔다.

없다!

데크 위에 있어야 

내 고사리 바구니가 없다!


내 아까운 고사리들 다 잃어부렀네.

생각하며 망연자실 돌아서려는데

데크밑 마당 한구석에

파란 고사리 통이 보였다.


바싹 말려 솜처럼 가벼운 내 고사리들은

강풍에 붕하니 날아가

마당 여기저기에 폭탄 파편처럼 널브러졌다.


대충 쓰레빠를 신고 달려 나가

어두운 마당으로 내려섰다.

고사리 바구니 안을 들여다보니

암것도 없다!

지랄을 한다아. 아주우 엠병을 하십씨요오.

내 귀한 고사리들이 다 날아가버린 것이 화가 나

마당에 혼자 서서 욕을 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주변을 손바닥으로 더듬더듬 더듬어보니

빼싹 마른 내 고사리들이

여기 한 개!   

저기 한 개!

여기도 또 한 개!

산산이 흩어졌다.


껌껌한 새벽 마당에서

쓰레빠를 신은 채 우드커니 서서 절망했다.

안돼애.

내가 어뜨케 모은 고사린디!


날이 밝아 사건 현장에 나가봤다.

고사리들이 사방팔방으로 널브러졌다.

피해자 흔적을 찾아

사건 현장을 유추해 내는

과학수사대처럼

고사리 잔해들을 차 차안히 살펴봤다.


어디쯤에서 고사리 통이 뒤집혔고

어느 지점에서 한번 더 뒤집혔다가

어느 지점에서 사방팔방  흩어졌는지 알만 했다.


내가 힘들게 모으고 삶고 말린 고사리들 인디!

밤새 안녕이라고

간밤 강풍에 다 날아가 불다니!

애쓰고 모은 고사리가 바람에 후떡 날아가

온 마당에 흝어져 있는 게 약이 올랐다.


나는 오기를 부리며

초원을 기어 다니며 고사리를 꺾을 때처럼

다시 우리 집 마당 잔디밭을 기어 다니며

하나씩 하나씩!

꾸역꾸역 기어이 줘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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