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안 Sep 06. 2024

저 허옇고 북실거리는 것은 무엇에 쓰이는 생명인고!

(feat.19년 묵은 진돗개를 만난 철없는 어린 노루)

집 뒤 드넓은 초원을

집마냥 돌아댕기며

풀을 뜯어 먹던

노루씨는

연한 풀 잎 따먹다가

발길 닿는대로 오다보니

급기야

우리 집 마당까지 들어 오게 되었다.


마당 귀퉁이 황금 편백 나무 밑에서

세상은 넓다.하며 무질서하게 뻗어가는

부드러운 칡 순을 발견하고선

여기가 진정 맛집이구나. 생각하며

겁도 없이

잘도 따 먹었다.


마당 데크에 앉아

볕 바라기를 하던

천수 만수 성불 직전인

19년 묵은 진돗개 릴리옹과

저 어린 노루씨 시선이

딱 맞닥드렸을 때,


일 초 이 초

잠시 정적이 흐르더니

릴리 옹은 별일 아닌듯

노루씨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콧 김을 한번 흥! 내 뱉더니

데크에 코를 박고서 엎드렸다.


머리 위 칡순을 따먹다가

그런 릴리옹과 시선이 마주친 노루씨는

저 허옇고 북실 북실거리는 것이

무엇에 쓰이는 생명인고 생각하며,

별일 아닌듯 고개를 돌리고

릴리옹 앞에서 여유롭게 다시 풀을 뜯었.


노루씨는 당시 몰랐겠지만서도

허어연 신선같은 릴리옹으로 말하자면

왕년 소싯적에

집 뒤 방대한 초원을

내 집마냥 휩쓸고 다니며

노루를 사냥해

어찌 어찌 질겅 질겅

어찌 어찌 와그작 와그작 해버리던  생명으로서,


혼자 심심하면 초원을 뒤져

뿔 두개 달린 노루 해골을 찾아 물고와

마당에서 노루 해골을 축구공삼아

이리 저리 굴리고 놀던

역사가 있는 존재다.


노루씨가 그걸 몰랐기에 망정이지

이 내막을 알았더라면

어린 노루씨는 릴리옹과 맞닥드렸을때

그 자리에서 딱. 얼음이 되어서

당장

앞으로 한발짝 가야할지

뒤로 한발짝 가야할지 헷갈릴정도로

엄청난 멘붕이 왔으리라.


순진한 어린 노루씨가 만난

릴리옹은

천수 만수 누리는 중이라

귀가 잘 안들리고

노안으로 인해 시야가 잘 안보이는고로

노루씨를 제대로 보기어렵거니와,


노루씨를 제대로 봤다하더라도

새파랗게 젊은 노루씨가

목숨을 부지하고저 쏜살같이 내뺀다면

뒷다리 슬개골 퇴화로

쫒아갈 힘도 없는지라

보여도 안 보이는척

들려도 안 들리는 척

세상만사 다 그런거지. 하며 개의치 않았.


세상 만사 알턱없는

철없는 어린 노루씨와

세상 만사 성불 직전

신선같은 릴리옹은

예기치않게

ㅇㅇ리 ㅇㅇ번지 마당에서 조우했으나

이러한 이유들로

어린 노루씨의 비명횡사같은

비극적인 결말없이 무난하게 잘 헤어졌다.


약 한시간 가량 마당에서 풀을 뜯는동안

실은

사느냐 죽느냐 갈림길에 섰던 노루씨는

이러한 사실도 모른채

먹어야 할 칡순들과

먹어야 할 곰취들과

먹어야 할 머위 잎을

배불리 다 먹은 후에

처언 처어언히 마당을 가로질러 걸어가

릴리옹 한번 뒤돌아보고서

대문밖으로 사라졌다.


저  허옇고 북실북실한 것은

도대체 무엇에 쓰는 생명일꼬. 재차 생각하면서 말이다.


릴리옹이 오년만 젊었더라면

저 노루씨는

멀쩡히 네 다리로 걸어

마당을 빠져나가지 못했을꺼고

모르긴해도

우리 집 마당에 뼈를 묻었을꺼다.
















#천수#만수 #진돗개 #마당 #철없는 #노루

#아그작

#마당에#뼈#묻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