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쉼, 틈, 곁
낭독크루 ‘다채로음’ 멤버들과 새벽낭독을 했고, 부산에 사는 멤버가 서울로 출장을 온 틈을 타 오프라인 모임도 가졌다.
모여서 수다를 떨다 보니 어느새 새로운 일을 벌이게 되었다.
제2회 다채로음 낭독회를 열기로 의기투합한 것이다.
주제는 무엇으로 할까?
번아웃으로 휴직 중이던 내 상황과 7월 초라는 시점이 실마리가 되었다.
첫 번째 키워드는 ‘쉼’.
정신없이 달려온 지난 시간을 잠시 멈추고 숨을 고르자는 뜻이었다.
상반기를 마무리하고 더위를 피해 휴가를 떠나는 시기이기도 하니, 우리 낭독회도 누군가에게는 하나의 휴식 같은 시간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는 ‘틈’.
일상에 작은 틈이 생기면, 사람들은 그 틈을 무엇으로 채울까?
문득 궁금해졌다.
그리고 마지막 한 글자를 찾기 위해 단어를 적어 내려갔다.
힘, 옆, 빛, 창, 춤, 곁...
‘마음을 주다’, ‘곁을 내어주다’ 할 때의 ‘곁’이 마음에 들어왔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일 때 가능한 것들이 있다는 걸 알기에, 마지막 키워드로 ‘곁’을 넣기로 했다.
그렇게 낭독회의 제목은 완성됐다. <쉼, 틈, 곁>
정신없이 달려온 지난 시간들,
잠시 쉼을 가지면서 일상의 틈을 발견하고
곁에 있는 이들을 돌아보는 건 어떨까요?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었지만, 사실은 내게 가장 필요한 말이기도 했다.
그날의 낭독회 풍경 몇 가지를 담아본다.
1. 쉼 ― 잠깐 멈춤의 시간
일과 집안일, 취미까지 쉴 새 없이 달려온 그녀는 늘 ‘철인’이라 불렸다.
그런데 어느 날, 암 진단을 받으며 처음으로 강제 멈춤의 시간을 맞게 되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휴식도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을.
암은 그녀의 몸이 보내온 과속방지턱 같은 신호였다.
그 시간을 지나며 불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덜어냈고, 끝내 남겨 둔 건 오직 ‘낭독’이었다.
낭독은 고요 속에서 마음을 가라앉히는 쉼의 공간이자, 삶을 새롭게 바라보게 한 케렌시아였다.
그제야 아이들이 불러주는 “엄마”라는 말이 감사히 들리고,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들리지 않던 것이 들리기 시작했다.
잠깐의 멈춤은 그녀에게 브레이크를 밟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녀는 고백했다.
이제는 쉼과 여유를 잃지 않겠다고.
그리고 낭독친구들과 함께하는 이 순간이야말로 ‘멈춤이 남겨 준 가장 큰 선물’이라고.
이야기 속 주인공이 바로 '무대 위의 낭독자'라는 걸 알게 되자 객석은 뜨거운 박수로 가득 찼다.
그녀의 담담한 고백은 많은 이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고, 우리 모두는 그녀에게 진심 어린 응원을 보냈다.
2. 틈 ― 나만의 ‘아무튼’
두 번째 낭독회에서는 새로운 시도를 했다.
바로, ‘관객 토크’였다.
“여러분의 틈을 채워주는 ‘아무튼, OOO’은 무엇인가요?”
입장할 때 관객들에게 빈칸을 채워 달라고 부탁했다.
‘아무튼, 책’, ‘아무튼, 여행’, ‘아무튼, 달리기’, ‘아무튼, 쇼핑’ …
각자의 일상 속 틈을 채우는 단어들이 가득했다.
오은 작가의 『다독임』에 실린 〈아무튼, 책이다〉 낭독이 끝난 뒤, 관객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았다.
자신만의 ‘아무튼’을 담은 고백들이 무대와 객석을 오가며 울려 퍼졌다.
‘아무튼’ 다음에는 각자의 삶이 있었다.
취미, 공간, 관계, 그리움...
그 짧은 한 줄 한 줄이 각자의 틈을 채워주는 방식이었다.
낭독과 낭독 사이의 잠깐의 틈은, 우리를 다정하게 이어주었다.
3. 곁 ― 함께 있어 비로소 완성되는 무대
이번엔 혼자 하는 낭독뿐만 아니라 함께하는 낭독도 시도해 보았다. 그중 내가 참여한 것은 낭독극 <순례주택>이다.
대본 작업, 대사 수정, 배경 이미지, 음악 편집 등 꽤나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함께 준비하고 연습한 멤버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서로의 호흡을 맞추고, 대사를 이어받으며 완성해 간 순간.
낭독이 단순히 목소리의 예술이 아니라 함께 만드는 호흡의 예술이라는 걸 깨닫게 해 주었다.
낭독회에서 신경 쓴 또 다른 하나는 ‘음악’이다.
노래의 제목, 가사, 분위기를 통해 우리의 마음을 전하고자 했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 S.E.S.의 <달리기>와 볼빨간사춘기의 <여행>이 흘렀다.
바쁘게 달려온 우리 모두에게 “이제 잠깐 숨을 고르자”는 신호 같았다.
이어진 제이레빗의 <요즘 너 말야>, 안테나뮤직의 <Everything is OK>, 옥상달빛의 <수고했어, 오늘도>는 서로를 다독이며 응원하는 마음을 담았다.
공연이 끝난 후에는 페퍼톤스의 <Thank You>, Ra.D의 <고마워 고마워>, CHEEZE의 <다음에 또 만나요>가 차례로 이어졌다.
낭독회를 마무리하며, 곁에 있어 준 관객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었다.
오늘 와 주셔서 고마워요.
다음에 또 만나요.
음악이 우리의 마음을 대신 전해준 순간이었다.
낭독회를 준비하는 내내, 우리는 정말 온 마음을 다했다.
영상 하나를 만들기 위해 밤을 새우며 편집했고, 영혼을 갈아 넣는 마음으로 무대를 만들었다.
끝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우리에게 ‘틈’과 ‘곁’은 있었지만, 정작 ‘쉼’은 없었다는 걸.
다음에는 절대 영혼 같은 거 갈아 넣지 말자, 다짐했다.
그런데... 장담은 못 하겠다.
▼ 낭독하는 사서교사가 추천하는 책
황선우X김혼비 『최선을 다하면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