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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 아우라

by 청리성 김작가
『자신의 소명을 지키고 이루기 위해 모든 것을 받아안을 때, 풍길 수 있는 향기』

‘아우라’라는 표현이 있다.

쉽게 근접하기 어려운 기운을 뿜거나 존경의 마음이 이는 사람에게 어울리는 표현이다. 국립국어원 외래어 표기 용례에 따르면, 바른 표기는 ‘오라’라고 한다. ‘aura’의 발음이 ‘아우라’가 아니라, ‘오라’이기 때문이다. ‘아우라’로 사용하는 이유는, 소리 나는 대로 발음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해본다. ‘그게 사실이야?’라고 놀라서 물을 때, 사실이라는 뜻의 단어인, ‘real’을 ‘레알?’로 재미있게 사용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오라’라는 발음보다 ‘아우라’라는 발음이, 단어의 의미를 더 전달하기는 한다.

‘오라’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이렇게 설명한다.

‘인체나 물체가 주위에 발산한다고 하는 신령스러운 기운’ (출처: 네이버 국어사전) 신령스러운 기운이라는 표현은, 쉽게 다가서기 어렵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쉽게 다가설 수 없다는 것은, 그 모습 자체에서 풍겨오는 느낌으로, 발걸음이 멈춰진다는 말이다. ‘와!’라고 감탄하며 그냥 바라보고 서 있게 된다.

출장이나 여행을 갔을 때, 아우라를 느꼈던 적이 몇 번 있었다.

공세리 성당 입구에 서 있는 350년이 됐다는 고목을 봤을 때가 그랬다. 원래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 나무는 원래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것처럼 그렇게 서 있었다. 손을 댈 엄두조차 나지 않았지만, 언제 다시 오겠냐는 생각에, 손바닥을 거칠한 표면에 살며시 갖다 댔다. 생각보다 거친 느낌이 아니었고, 차가웠다. 공세리 성당 역시 그랬다. 완공된 지 100년 가까이 된 성당이었지만 세련돼 보였고, 성당 안은 유럽풍으로 잘 정돈된 느낌이었다.


제천으로 출장을 가서, 박달재 고개에 들렸다.

출장지 바로 옆이었고, 이름만 많이 들어봤기 때문에, 울고 넘는 박달재가 궁금했다. 양옆으로 나무가 우거져 있는 도로는 비가 온 뒤라 그런지 축축했고, 덕분에 공기는 상쾌했다. 창문을 열고 자연 공기를 마시며 올라가는데 고요했다. 내려오는 차도, 따라 올라오는 차도 없었다. 정상에 도착했는데, ‘울고 넘는 박달재’를 상징하는 조각상이 여럿 보였고, 설명하는 팻말도 여럿 보였다. 차에서 내려 2~3분 정도 둘러보고, 다시 차에 올랐다. 기대한 것은 없지만, 생각보다 별거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출발하고 내려오면서 하나의 조각상을 봤는데, 엄청난 아우라를 느꼈다.

나중에 검색해서 찾아보니, 내가 본 것은 ‘오백 나한전’이라는 것이었다. 오래된 고목과 그 안에 금빛이 나는 부처님 상은, 스치듯 봤는데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 잔상이 내려가는 내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다시 올라가서 자세히 볼까를 몇 번 망설였지만, 그냥 내려갔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나중에야 아쉬운 마음이 올라왔다.


아우라를 느꼈던 장면을 돌아보면, 오랜 시간이 담겨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단순히 오래됐다는 시간의 개념 이외에, 그 시간 동안 묵묵히 견뎌온 묵직함 같은 것이 느껴졌다. 비와 바람을 견뎌낸 시련일 수 있고, 무너지고 파괴될 수 있는 공포일 수 있다. 누군가의 오랜 노력과 정성일 수 있다.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누가 설명해 주지 않아도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이해되는 묵직함이 있다.

묵직한 느낌은, 모든 것을 받아안을 때 풍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존경하는 마음을 가진 위인을 떠올려도 그렇다. 자신의 소신을 지키고 이루기 위해 모든 것을 받아안았다. 시련과 공포 그리고 노력과 정성을 받아안았다. 그렇게 묵묵히 걸었던 분들이 자신의 길을 냈다. 우리는 그 길을 따라가면서, 더 좋은 길로 다듬거나 더 좋은 길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것을 소명으로 삼고 노력할 때, 우리도 미약하나마 좋은 아우라를 풍길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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