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르누보의 꽃과 여인
꽃그림 명화 15, 알폰스 무하, 관능적 신비감이 드는 꽃과 여인
아르누보의 대표 화가 알폰스 무하(Alphonse Maria Mucha,1860~1939)는 1860년 체코의 모라비아 지방 이반치체에서 하급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와 이복누나의 죽음으로 절망에 빠져있던 어느 날, 우연히 신문에 난 광고를 보고 무작정 지원하여 오스트리아 빈 카우츠키 공방에서 무대장치를 맡을 화가로 생활하게 된다. 하지만 작업장의 화재로 그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프리랜서로 활동을 하게 되었다.
이때 체코의 칼 쿠헨-벨라 백작이 무하에게 자신의 성의 벽화를 부탁하게 되고, 무하는 자기 스타일의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본 백작은 그 작품을 너무 좋아해서, 무하는 전폭적인 백작의 지원을 받으며 뮌헨과 오스트리아 미술원에서 정식 교육을 받게 된다.
뮌헨에서 미술 교육을 받고 다시 청운의 꿈을 안고 1887년 파리로 간 무하. 그러나 이방인 무하는 아웃사이더처럼 외롭고 힘든 유학 시절을 보내게 된다. 아카데미 줄리앙와 콜라호시에서 전통적인 미술 교육을 받으면서 잡지와 광고 삽화를 그리면서 근근히 생계를 이어 나간다. 이 때 고갱과 만나 둘이 사이 좋게 지내면서 고갱은 무하의 아뜰리에에 자주 놀러와서 같이 숙식을 해결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1894년 어느날, 우연히 소개받은 극장에서 ‘지스몽다’ 포스터를 2주안에 만들어 달라는 부탁이 들어온다. 그리고 그는 자고 일어나니 갑자기 스타가 되었다. 당시 유명한 여배우인 사라 베르나르를 그린 포스터는 대박을 치고, 사라는 그의 포스터가 너무 맘에 들어 무하와 6년간 계약을 체결하였다. 그녀가 공연하는 연극의 포스터뿐만 아니라 극장의 무대장치와 의상까지 담당하게 되었다.
당시 사라 베르나르는 당대 최고의 여배우로서 유럽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유명했는데, 극작가들은 그녀를 염두에 두고 작품을 썼고, 화가와 사진작가들은 그녀를 담기 위해 애썼다. 무하는 그녀의 전속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달력, 일러스트, 상품 광고 등 활발한 활동을 하며 대중예술가로 이름을 날렸다. 이후 화려한 장식만큼 아름다운 여인들의 그림은 당시 대단한 인기를 끌었고, 무하는 지금까지의 회화스타일과는 완전히 다른 그의 그림으로 아르누보 (Art Nouveau)의 대표적 화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고, 이후 그는 고생 끝, 행복 시작의 삶을 살게 된다.
1906년 마리 히킬로바와 프라하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미국으로 이주해 뉴욕 등지에서 강의를 하며 전시회를 열었다. 이후 1910년에는 가족과 함께 조국 체코에 금의환향하며 정착하게 되었다. 이후 무하는 체코의 역사와 민족애를 담은 20개의 연작 <슬라브 서사시>를 그리며 말년을 보냈다.
낭만적인 꿈의 세계를 창조한 무하는 이류에 머물러 있던 실용미술을 순수미술의 단계로 끌어올린 예술가였으며, 대량으로 인쇄된 그의 그래픽 작품은 시대의 요구에 따라 예술을 일상생활 속으로 끌어들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무하의 포스터는 주제를 가진 시리즈물로 제작된 것이 많은데,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4계절 그림이다. 4계절을 의인화해서 관능적 신비감이 드는 꽃과 여인으로 표현한 이 작품들은 우아한 곡선과 화려한 장식성으로 아르누보의 대표적인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