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섬타로}가 드리는 열여섯 번째 편지
준비라는 것은 없다.
지금 이 순간만이 있을 뿐. - 휴 로리
동네의 구두미포구는 배 몇 척이 늘 정박해 있는 작은 포구였다. 작년부터 구두미는 인스타그램에서 노을 보기 좋은 장소로 알려졌는지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노을도 보고 수영도 하는 핫플레이스가 되었다. 처음엔 동네의 조용하던 포구를 관광객들에게 빼앗긴 듯 서운한 기분을 안겨주더니, 자주 산책을 가고 수영도 가고 하며 물놀이하며 행복해하는 사람들을 보니 내 마음도 점차 편안해졌다.
매일 산책을 나가 걷다 보면 자주 구두미포구에 앉아있다 오게 된다. 그곳에서 자주 동네 지인들이나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수영하고 돌아가거나 막 도착하는 중이거나 노을을 보거나 친구들과 수다를 떨던 그들과 마주치면 이게 제주살이지, 하는 실감이 난다. 어제도 혼자 물놀이 온 친구 H을 몇 년 만에 만나 기분 좋게 인사했다. 내일 물놀이 같이 가자 하고 헤어졌다. 동네 단골 카페 사장님 부부도 뵈었다. 따님과 함께 다정하게 사진 찍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흐뭇해졌다. 귀여운 도시 강아지들도 자주 온다. 무엇보다 즐거운 건 여기선 보기 힘든 꼬마아이들 보는 재미, 강아지처럼 순한 아이들을 위해 우리 BB도 그들에게 인사하고, 다정하게 기다려준다. 넌 몇 살이야? BB는 12살이야, 하면 눈이 똥그래지는 아이들. 사람을 만나 좋은 에너지를 주고받는 일이 여름 저녁의 가장 특별한 이벤트다. 높은 데서 다이빙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걱정되기도 하면서도 맞아, 저게 젊음이지 싶어지는 여름이다. 그 뜨거웠던 여름이 거의 끝나가고 있다.
어제는 포구에서 추석 보름달을 보았다. 한참 노을을 보고 있다가 뒤돌아보니 둥실 환한 보름달이 떠 있었다. 소원 빌어야지. 내 친구들 역시 달을 보고 소원을 빌 줄 아는 고전적인 사람들이다. 그 순간 내 주변에도 달을 바라보며 소원을 비는 이들이 여럿 있었을 거라 믿는다. 고3 때 처음으로 소원을 빌던 생각이 난다. 그해의 내 소원은 연말에 바로 이루어졌다. 그때부터 해마다 추석 보름달은 내게 소원을 들어주는 특별한 달로 존재했다. 놀랍게도 내가 빈 소원은 매번 이루어졌고, 그래서 더 신비롭게 생각되기도 하고 감사한 마음을 가진 채 소원빌기를 이어오게 되었다. 추석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달 뜨기를 기다리며 미리 소원을 생각해 보는 간절한 마음인 것이다.
새해 2024년이 시작된 지 벌써 9개월이 흘렀다. 어느새 첫 마음은 흐지부지 되고, 요 며칠 피곤하단 핑계로 매일 써오던 플래너 쓰기도 나흘이나 건너뛰고 말았다. 슬럼프일까. 다음에 하겠다고 미루고 있는 일들을 할 수 있는 다음이란 시간은, 과연 언제 오는 것일까. 자연은 참으로 부지런하고 자연스럽게 절기에 맞춰 변화한다. 난 그 자연을 거스르며 내 나름의 리듬을 타며 살려고 애쓰고 있지만, 늘 부족함을 느낀다. 뭔지 모르게 지쳐있고 힘든 지금의 나에겐 무엇이 필요한 걸까.
"나는 내가 신성한 힘에 의해 인도되고 보호받고 있음을 압니다. 기쁨과 삶의 목적을 위해 가볍게 앞으로 나아가려 합니다. 예측하고 기대하기보단 마음을 열고 받아들일 때 쉽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압니다. 더는 준비도, 훈련도 필요 없어요. 가벼운 마음으로 그저 나아가려 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할 때의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존재하며 그 자체로 이미 충분합니다."
물놀이한 날의 잠은 달콤하다. 그 달콤한 잠은 꼭 죽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매일 죽고 아침이면 새로 태어난 듯 눈 뜬다. 그렇게 선물처럼 주어진 하루를 방금 태어난 아이처럼, 여행을 떠난 첫날의 여행자처럼 감사하며 살아보고 싶다. 다시 기꺼이 또다시! 삶은 오직 오늘, 지금 이 순간뿐이다.
* 숲섬에서 당신의 이야기를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