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섬타로} 자신을 위한 스물한 번째 편지
지워진 단어를 들여다본다
희미하게 남은 선의 일부
ㄱ
또는 ㄴ이 구부러진 데
지워지기 전에 이미
비어 있던 사이들
그런 곳에 나는 들어가고 싶어진다
어깨를 안으로 말고
허리를 접고
무릎을 구부리고 힘껏 발목을 오므려서
희미해지려는 마음은
그러나 무엇도 희미하게 만들지 않고
덜 지워진 칼은
길게 내 입술을 가르고
더 캄캄한 데를 찾아
동그랗게 뒷걸음질 치는 나의 혀는
ㅡ 한강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중, 문학과지성사(2013)
<작별하지 않는다>를 다시 읽으며, 섬세하게 쏟아지는 눈송이 같은 작가님의 문장들에 내내 감탄한다. 눈에 대해 한강은 "어떤 것과도 닮지 않았다고 나는 생각했다. 이렇게 섬세한 조직을 가진 건 어디에도 없다. 이렇게 차갑고 가벼운 것은. 녹아 자신을 잃는 순간까지 부드러운 것은."(<작별하지 않는다> 186쪽)이라고 썼지만, 작가님의 문장이야말로 그토록 가볍고도 부드럽게 주변의 에너지와 소리까지 빨아들이며 독자의 가슴에 작은 눈송이로 내리다가 결국 거대한 눈폭풍을 일으키고 마는 깨끗한 눈을 닮았다. 올 겨울의 첫눈을 벌써부터 기다리게 되었다. 이토록 섬세한 문장들에 온 마음을 내주며 하루를 보내는 지금이 꿈처럼 가볍고 아프면서도 행복하다.
지난여름부터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을 했다. 어린 시절 자전거로 등교하던 생각이 나기도 하고 그때의 기억들이 고스란히 떠올라 즐겁기도 했다. 자전거를 타면 자주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러다 어제는 그만 내리막에서 (그렇게 될 이유가 전혀 없었는데도) 앞으로 고꾸라지며 슬로우 모션처럼 시간이 잠시 길어졌다가 얼굴부터 바닥에 떨어져 처박히고 말았다. 얼얼하고 떨떠름하게 몸을 살펴보니 오른 다리가 넘어진 자전거 뒷바퀴와 함께 하늘로 뻗쳐올라가 있고 안경은 120도 정도로 벌어지고 앞면은 바닥에 잔뜩 긁힌 채 바닥에 팽개쳐져 있었다.
겨우겨우 일어서서 자전거를 일으키고 옷을 털었다. 거울을 보기가 두려웠다. 얼굴부터 떨어졌으니 이 얼굴에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핸드폰 셀프카메라로 살펴보니 콧등에 길게 한 방울, 코 아랫부분 두 군데에서 피가 흐르고 있어 닦아냈다. 그늘까지 걸어가 어지러운 증세가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 물을 마시며 N에게 데리러 오라고 전화를 했다. 진정이 되자 욱신욱신 오른쪽 고관절과 왼 무릎이 아파왔다. 병원에 가며 살펴보니 오른쪽 앞니 끝부분과 옆 송곳니 끝이 미세하게 깨져 있었다. 다행히 얼굴뼈나 다른 곳의 뼈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 오른쪽 이마 위와 광대뼈에 살짝 찰과상 말고는 왼손 새끼손가락에만 깊은 상처가 있었고 다른 부분은 기적처럼 괜찮았다.
병원에서 치료를 끝내고 집으로 와서 쉬었다. 아껴뒀던 월차를 이틀 신청했다. 주말에 여행을 앞두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가기 힘들겠다. 운동도 이번주는 쉬어야 한다. 하룻밤 자고 나니 온몸의 통증이 제대로 느껴진다. 한강 작가님의 책을 펼치자 어쩐지 이 통증 따윈 아무렇지 않다고 느껴지고 극 중의 그들에게 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무리 아파도 책을 읽는 일만은 멈추지 않고 계속하고 싶었다.
"거기 나오는 사람들.
(...)
총에 맞고,
몽둥이에 맞고,
칼에 베여 죽은 사람들 말이야.
얼마나 아팠을까?
손가락 두 개가 잘린 게 이만큼 아픈데.
그렇게 죽은 사람들 말이야. 목숨이 끊어질 정도로
몸 어딘가가 뚫리고 잘려나간 사람들 말이야."
-<작별하지 않는다> 56, 57쪽 (책에선 이탤릭체로 쓰인 인선의 말)
많은 분들이 한강의 책을 읽기가 힘들고 어렵다고 말한다. <소년이 온다>를 읽다가,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다가 그만 책을 덮어버린 게 나 또한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이젠 이 이야기의 바닥까지 깊이깊이 내려가 끝까지 써 내려가고만 한 사람을 생각하게 된다. 얼마나 고통스럽고 두려웠을까. 이야기가 주는 충격, 통증과 아픔에 놀라고, 그 모든 것을 고스란히 자신의 일처럼 겪으며 써 내려간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이젠 전 세계의 많은 이들이 이런 식의 전율과 충격과 연대의 마음을 갖게 될 것이란 사실에 더욱 마음이 떨린다.
섬세하고 예민한 감각을 가진 많은 이들은 어려서부터 부서지고 깨지기 쉽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런 감각을 차라리 모르고 살기를 희망하고 많은 순간 모른 척해왔다. 그러면서도 시를 쓰고 싶다는 모순된 희망을 가졌었다. 진실을 보는 두려움보다는 모든 걸 덮어두는 쪽을 자주 택했던 것이다. 기억을 미화하고 나 자신을 포장하고, 마음을 거스르는 무엇을 간과하고 다시 돌아가 살펴보기를 회피했던 시간이 떠올라 한없이 부끄러웠다. 나 스스로를 약한 존재라고 여기고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던 날들이 자꾸 떠오른다. 인간. 이토록 모순적인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자꾸만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한강의 책은.
그래서 온몸이 아프다. 다친 게 아프다기보다 용기를 내지 못한 내가 부끄럽고 그 아픔들을 진작 들여다보지 못한 내가, 알았다 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살아온 지난날이 부끄럽고 아프다. 이렇게 허공으로 집어던져 저 내팽개쳐지고 나니 정신이 퍼뜩 든다. 인간답게, 하루를 살아도 제대로 보고 듣고 느끼며 서로를 생각하고 위하며 살고 싶다. 한강이 어느 인터뷰에서 말한 대로 깊이깊이 주인공들 이야기의 끝까지 내려가 가만가만 이야기를 듣고 눈을 맞추고 서로를 위해 초 하나를 켜고 지켜줄 수 있는 진짜 독자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