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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나 Nov 30. 2020

6. 성탄절

1919년생 외할머니는 2019년 성탄절에 돌아가셨다. 건강하게 장수하신 건 아니었다. 엄마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외할머니는 항상 아프셨다. 큰 병에 시달려서 목숨에 지장이 있는 건 아니었고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정도의 질환이 늘 있었다. 노인에게는 치명적이라는 고관절 골절에도 외할머니는 다시 걸을 수 있게 되었고 언제부턴가는 요양원 생활을 하셨다. 그 후로도 노인성 질환이나 치매 등이 찾아왔지만 큰 문제없이 지내셨다.


난 사실 외할머니를 본적이 거의 없었다. 할머니와 아빠와 함께 살 때 엄마는 친정에 자주 가지 못했다. 내 기억에 명절 때 외가댁이 있는 부산에 가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보통 맏아들이 부모님을 모신다는 시대 분위기와는 달리 아내를 너무 사랑해서 어머니를 모실 수 없다는 큰아빠 대신 마마보이 막내아들인 우리 아빠가 할머니를 모셨다. 정확하게는 엄마가. 명절 연휴 내내 엄마는 일했다. 큰집은 차례가 끝나고 나면 큰엄마의 친정으로 갔고 고모들은 본인 시댁 일정이 다 끝나면 친정인 우리 집에 느지막이 들렀다. 한 번은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는 왜 외할머니 보러 안가?”

“뭘 보러 가니. 그 먼데까지”

늘 이런 식으로 얼버무렸고 아주 가끔씩 외할머니와 통화하는 엄마는 늘 화만 냈다. 나도 엄마에게 참 정 없고 차가운 딸이었지만 그런 내가 봐도 뭐가 저렇게 화가 날까 싶을 정도로 외할머니에게 화를 냈다. 결혼해서 고생만 하는 딸이 안쓰러웠던 외할머니는 엄마를 걱정하는 말을 했을 테고 결혼해서 늘 엄마에게 불행한 모습만 보여서 죄스러웠을 엄마는 그런 외할머니가 불편했을 거다. 마치 지금의 나처럼 말이다.


마지막으로 외할머니를 뵌 건 3~4년 전이었다. 엄마와 언니, 나는 외할머니가 계신 요양원에 방문했다. 제일 가까이서 외할머니를 보살피고 있는 조카며느리와 가까운 수녀원에서 수녀로 계시는 막내딸 수녀님이모만 간신히 알아보시고 우리 엄마는 전혀 알아보지를 못했다. 

엄마는 그런 외할머니를 보고선 뒤돌아 눈물을 흘렸다. 딸도 못 알아보는 외할머니를 원망하듯 말했지만 그 속뜻은 죄송함이었다. 본인이 얼마나 소홀했는지를 잘 알기에.

“엄마, 엄마는 그렇게 나한테는 서운해 하면서 엄마야말로 외할머니한테 잘 좀 해드리지!”

난 그 와중에도 엄마에게 잔소리를 해댔다. 내 나름의 위로였는데 통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런 외할머니를 보며 엄마는 자주 하는 말이 있었다. 

“너무 오래 산다. 저렇게 아프게 사는 건 의미가 없다. 저렇게는 오래 살고 싶지 않다. 나도 너희 외할머니처럼 왠지 골골거리며 오래 살 것 같아 큰일이다.”

그 말에 나도 어느 정도 공감했었다. 엄마는 실제로 자주 아팠고 병원 신세도 자주 졌다. 하지만 생명에 지장을 주는 병은 없었다. 이런 점들이 외할머니와 똑 닮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끔은 나의 미래를 그려볼 때 암울하기도 했다. 우리 엄마도 100살까지 살면 내 나이 70인데 내가 먼저 죽으면 어쩌지? 그땐 엄마를 어떻게 돌봐드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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