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멋진 인생을 만들어 가면 되는 거야.
한국 밖으로 나와보면 삼성과 현대만이 엄친아, 엄친딸이 간다는 신의 직장이 아님을 발견하게 된다. 한국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한 한국 기업이 지구 반대편에서는 그 동네 작은 회사보다 인지도 없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듣보잡’ 기업으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한국처럼 대기업이나 ‘사’자 들어가는 직업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며, 우리가 좋다고 생각하는 직업이 어떤 곳에는 사양 직업이 되기도 한다.
미국 추수감사절, 땡스기빙데이 파티에 초대되어 친구 집에 놀러 간 적이 있다. 파티를 주선한 친구는 중국계 미국인으로 미국 뉴욕대 MBA를 졸업한 친구였는데, 그래서 그런지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 대부분이 같은 대학 MBA를 졸업한 대학 동기들이었다. 파티에 도착해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하니, 예전에 한국에서 살았었다며 나를 반겨주었다. 사실 상하이에 살면서 한국에서 살았었다는 외국인들을 종종 만나 온지라, 그다지 놀랍지는 않았지만, 예의상 한국이 어땠는지 물어보았다. 한국에 대한 칭찬이 나올 것을 속으로 예상하면서.
“별로 좋지 않았어.”
엥? 한국인을 바로 앞에 두고 하는 한국에 대한 첫 이야기가 ‘좋지 않았다’라니!
“헉, 정말? 왜? 뭐가 그렇게 최악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반응에 놀라서 묻자 이어서 대답했다.
“한국은 물론 좋았지, 근데 한국에서 직장 생활은 최악이었어.”
“그래? 한국 직장 생활이 쉽지 않은 건 알고 있었지만, 한국 직장 문화는 한국인한테만 적용되는 일이고 한국에 사는 외국인들은 나름 외국인 특혜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네.”
“지금 여기 초대받은 사람들 대부분이 한국에서 같은 직장에 다녔던 사람들이야. XX 회사 알지?”
모를 리가. 한국 최고의 대기업이다.
“인터네셔널 부서에서 같이 일을 했는데, 그 인터네셔널 부서 사람들은 모두 외국인으로 구성된 부서였어. 글로벌 기업인 만큼 외국인의 생각과 아이디어를 수렴하겠다는 취지에서 만든 부서였지. 그 부서에 일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전 세계에 내로라하는 대학과 MBA를 나온 사람들로 졸업하자마자 이곳에 스카우트 되어서 한국으로 온 경우였어. 첫 시작 커리어를 한국이라는 해외 그리고 이름있는 글로벌 대기업 거기에 연봉까지 높으니 커리어 상으로는 완벽한 곳이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1-2년 후 다른 곳으로 이직을 했어.”
“왜? 업무량이 많거나 야근이 많았어?”
“아니. 오히려 그 반대여서 문제였어. 네가 말한 대로 외국인 특혜가 있어 야근 문화도 없고, 연봉도 높고, 복지 혜택도 좋았지만, 우리는 겉보기 좋으라고 구색 맞추어 만든 부서 같았어. 다들 넘치는 열정으로 회사에 이바지 하고자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제시하면 ‘좋은 아이디어네’라고 하고 결국은 우리 의견을 하나도 듣지 않는 거야. 거기에서 오는 무기력함과 허무함이란… 1, 2년 정도 지나니까 차라리 돈을 적게 받아도 좋으니 내 의견이 수렴되는 곳, 내가 쓸모 있는 곳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렇게 하나 둘씩 이직한 거지. 물론 그 중 가정이 있는 사람들이나 학자금 대출 때문에 돈이 필요한 사람들은 회사에 더 남아있었지만…. 근데 그 사람들도 길어야 5년을 넘기지 못하더라고. 나뿐 아니라 얘(옆에 앉아 있던 다른 친구)도 그렇고 우리 둘 다 지금 일하는 회사 연봉이 한국에서 받은 것에 비하면 한 참 적지만, 돈의 유혹에서 벗어나 빨리 그만두고 이곳에 온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우리나라 기업에서 이렇게 똑똑한 인재들을 모아놓고 돈은 돈대로 써가며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한국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가고 싶어 하는 대기업이 이들에게는 최악의 기업으로 기억 속에 남아있다는 것이 더욱 놀라웠다.
상하이에서 일한 지 2년 정도 지났을 즈음이었다. 지인이 상하이에 소재하는 한국의 대기업에서 비서를 뽑고 있는데 내가 적임자인 것 같다며 지원해 보라고 지인의 친구라는 인사 담당자를 연결해 준 적이 있다. 한국에 있을 때 짧지만 비서로 일한 경력도 있고 한국에서 워낙 이름있는 대기업인지라 솔깃하며 정성 들여 이력서를 작성해 제출했다. 이력서를 보낸 지 몇 시간이 채 지나지도 않아 인사 담당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력서 잘 받아보았어요. 이력서를 훑어보니 훌륭한 지원자임은 분명한데 안타깝게도 그 자리가 오직 미국 대학을 졸업한 사람만 채용하는 자리여서 이렇게 전화 드렸어요. 지원하기 전에 친구한테 이러한 채용 조건을 미리 전달해줬어야 하는데 깜박했네요. 괜히 수고하게 해서 미안해요.”
실망스러운 통화였다. 미국 대학을 나왔다고 다 영어를 엄청나게 잘하는 것도 아니던데, 영어를 시켜보지도 않고 대놓고 출신 대학만으로 면접 당락을 갈라낸다는 것이 어이가 없었다. 나를 추천해준 지인 역시 미안하다며 한 마디를 보탰다.
“그 인사 담당자한테 나중에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거기 떨어지길 잘 한 거 같아. 듣고 보니, 거기서 비서가 하는 일이 아주 자질구레한 일이래. 상사가 오늘 무슨 영화가 보고 싶다고 하면 한국어 자막이 있는 영화를 검색해서 다운로드하거나 DVD를 사오는 일과 같은 심부름 업무가 주된 일이라고 하더라고.”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지인 말대로 떨어지길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한편으로는 더욱 황당했다. 영어와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하는데 미국 대학을 나온 사람만 뽑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그때는 출신 대학이 미국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면접을 보지 못한 것이 조금 속상했지만,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다. 왜냐하면 대기업과 좋은 직장을 다니는 것이 잘 사는 인생의 척도가 아님을 알고 있으니까.
대기업에 취직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월급이 많지 않더라도 내가 행복하면 된 것이다. 그리고 이 넓은 세상에는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만한 멋진 일이 생각보다 훨씬 많다.
브런치에서 못다한 이야기들은 책에서 만나보실 수 있어요. :)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44574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