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먀우 Jun 20. 2020

독일 손절

나를 설득하려고 쓴 글일지도

꼴 보기가 싫어서 독일을 인생에서 손절했다. 쩝쩝 소리내며 밥 처먹는 꼴보기 싫은 놈이라도 보는 마냥 독일의 모든 모먼트들이 비위가 뚝뚝 떨어지길래, 내 인생에서 더 안 보기로 하고 떠난 지 삼개월이 되어간다.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독일에 계속 있었더라면 받았을 실업급여 Sperrzeit (퇴직금을 어느정도 뜯어냈기 때문에, 실업급여가 12주 기간 동안 잠기는 기간) 이 끝날 때가 되었고, 대구 날씨는 개구리탕이라도 끓일 마냥 절절 끓기 시작했다. 미련이 안 남는다면 거짓말이지만, 어쨌거나 대체적으로 집밖으로 안 나가고 있기에 한국 집콕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


살면서 미련을 가진 적이 드문 사람인데, 왜 독일엔 약간이나마 미련이 남는가 생각해 봤다. 일단 대구가 너무 덥다. 북부 독일의 추운 여름, 일년에 반팔 옷을 입고 밖에 나갈 기회라곤 2-3주가 될락 말락하는 날씨에서 진짜 더위가 뭐였던가 잊고 살았다. 덤으로 살던 집이 난방비가 비싸 난방텐트니 뭐니 하는 것들을 바리바리 지고 낮은 기온에 간신히 몸을 적응시켜 놓았다. 그렇게 서늘함이 몸을 베지 않게 적응을 마칠 때 즈음 절절 끓기로 유명한 도시로 돌아왔으니 29도를 매일 넘나드는 방 기온에 적응이 안 될 수밖에. 하지만 체온 유지의 어려움이 유일한 이유는 아닐 터다. 가만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가장 큰 원인은 독일에 몰입하고 열정을 불태운 순간이 한번도 없어서가 아닐까 싶다.


큰 이사를 앞두고 여태껏 쌓아 온 짐을 죄 내다 버리고 팔았다. 모든 것을 다해 사랑했던 물건들은 버리는 데 큰 미련이 들지 않았다. 문제는 언젠간 봐야지 하고 여태 보지 않은 물건들이었다. 지금도 사랑하는 물건들과 앞으로도 보지 않을 물건들을 한 데 섞어 한국으로 부쳤다. 지난 5년간 보지 않았으니 다음 5년도 아마 건드리지 않을 거지만, 그 남겨진 사랑의 가능성 때문에 떠나보낼 수 없는 물건들. 미련이란 결국, 언젠가는 사랑에 빠질 수도 있지 않을까? 다른 방식, 다른 시간이었다면 사랑했을 수 있지 않았을까? 의 집합체인가 보다. 완벽하게 남김없이 사랑한 것들은 후회를 남기지 않았다.


나는 독일을 대체적으로 참 좋아했었다. 학부에서 독어독문학을 전공했다. 비록 재미있는 독일 문학 찾기엔 끝까지 실패했지만, 독일 문화와 문학, 역사와 철학 그리고 언어에 대해 배웠다. 독일의 작은 도시로 교환학생을 다녀왔다. 그 기억이 좋아, 졸업장을 8월에 받고, 11월에 워킹홀리데이 비자와 함께 독일로 다시 떠났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는 학생 비자로 연장됐고, 학생비자는 파트타임으로 일하던 회사에서 풀타임 포지션을 얻으며 자연스럽게 고급인력 노동 허가증인 블루카드로 바뀌었다. 21개월간 착실하게 연금을 낸 후에는 영주권 또한 문제 없이 받아들었다. 독일에 떨어진 첫 달 어학원에서 제공한 숙소에 앉아 상상했던 향후 진로와 목표한 것은 모두 이루었고, 더는 계획이 없었다. 내가 살던 곳자전거를 타고 어디든 갈 수 있는 한적한 동네였다. 조금만 나가면 끝없는 들판이 펼쳐지는 것이 좋았다. 축축한 겨울에 한적한 길을 휴대폰 하나 들고 조깅하면서 돌아다니던 일 같은 끝없는 적적함을 무척 좋아했다. 남의 일에 별 간섭을 않는 철저한 개인주의도, 아주 조금이라도 돌려 말했다가는 영원한 대화의 평행선을 달리는 직설적인 화법도 적성에 맞았다. 워터 슬라이드가 다섯 개 딸린 회사 근처의 수영장을 헬스장 시설 합쳐 한달에 십만원에 이용할 수 있는 것도 좋았다. 하지만 평온했을 뿐, 맹렬히 사랑하진 못했다.


한국에서 충분히 채워 온 내 마음과 용기가 바스라져 흩날리는 데는 3년 정도가 걸렸다. 석사를 졸업하고 일을 시작한 후였다.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고 공부하다가 내가 살던 도시 근처의 작은 마을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대부분인 회사에서 일을 하게 되어서 숨이 막힌 건지, 아니면 부서진 마음을 직시할 여유가 비자나 돈, 취업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어서야 생긴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내가 속한 팀은 예전의 어디로 튈 지 모르는 여러 아이디어와 포텐셜을 가진 VR 팀의 모습을 잃고 그 지역 사람들이 대부분인 인더스트리 기반 소프트웨어 회사가 되었다. 내가 꿈꿨던 많은 것들은 이해받지 못했다. 어느 순간 나는 그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를 거울처럼 비추고 있었고, 가 닿지 않는 언어라면 늘어놓기를 포기했다.


평온한 척 물밑으로 크고 작은 다툼들이 오가던 시절이 지나고 대격변을 겪으면서 많은 주요, 초기 멤버들이 회사를 떠났다. 나도 떠나는 사람 중 하나가 되었다.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급작스러웠다. 먼저 떠난 사람이 가 있던 회사에 면접을 봤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 즈음 만난 모두가 내가 좋아하는 걸 하라고 했다. 이정도면 충분히 좋아해온 것 같은데. 이보다 더 좋아하는 거? 그런 게 과연 있을까? 모든 게 다 지긋지긋했다. 독일에서는 아시안 여성으로서의 한계가 너무 명확해 떠나려 결정은 이미 오래 전에 내린 후였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한번도 가지 못한 나라에서 새로운 모험을 펼치기엔 이것저것 준비할 시간이 더 필요했다. 독일어로 법률을 읽고 완벽히 해석할 수 없는 언어능력 하에서 법정 공방으로 가게 되면, 나는 얼마나 도움받고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살면서 소송에 한두번은 누구나 휘말릴 가능성이 있을 텐데, 그런 상황이 또 왔을때 나는 얼마나 부서지지 않고 싸움을 계속해 나갈 수 있을까?


매니저는 내가 떠날 날자를 조정하는 마지막 미팅에서 다른 문화를 이해하는 것은 낭비이고, 자기들은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 없다고 했다. 내 미래를 통보한 다음 날 매니저는 세계화 전략 프리젠테이션을 했다. 그들은 가장 다양성을 담당하던 내가 없는 미래를 꿈꾸면서 국제화를 논했다. 그들의 외국은 스위스, 오스트리아, 미국 정도에나 해당할 거니까. 나를 위한 일말의 상상력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면 나도 있고 싶지 않았다. H는 우리 회사의 이런 오래된 인력을 내치는 문제점을 알고 있다며 나를 받아주는 다른 회사를 찾으라고 했다. 다 피곤했다. 인생에 항상 은은하게 깔려 있던 긴장 상태, 악성코드처럼 내 뇌를 좀먹는 독일을 삭제하고 편히 쉬고 싶었다. 길을 걸으면서, 수퍼에 가면서, 결코 일타에 나를 부수진 않을 공격들에 날서있는 일. 누군가가 길에서 나에게 소리를 지르면 거기에 벙쪄서 아무 말도 못하지 않기 위해 대비하는 일. 그 무엇도 아주 결정적이진 않았던 일들이 오랜 시간 쌓이고 쌓여 위태로워졌고, 그 위태로움을 툭 무표정으로 밀어 넘어뜨리는 사건, 그 정도의 무심함이 일어났다. 더 이상 악을 쓰기도, 시도하기도, 내 위태로움들을 외면하기도, 날이 선 성정을 합리화하기도 지긋지긋해졌다. 다행이 법정 공방으로 가기 전에 회사는 내 요구를 받아들여 얼마간의 퇴직금 (독일은 해고당하는 경우를 제외하곤 퇴직금이 없는데, 우리나라의 퇴직금 개념이라기 보다는 그냥 이 돈 줄테니 우리 법정에서 만나지 말자라는 의미의 합의금이다) 을 제시했고, 나도 거기에 만족했다. 3년 7개월, 이 소프트웨어의 시작부터 내가 있었다. 프로토타입에서 릴리즈까지 소프트웨어의 한 사이클을 지켜봤다. 내가 떠난 후로도 별 새로울 것이 없을 테지. 어떠한 미련도 남지 않는 거 보니 회사 일엔 오랜 기간 진심이었나 보다.


독일 사회 속에서, 나라는 인물은 입체적으로 조명되지 못하고 아주 얇은 한 단면만 끝없이 평가당했다. 그러한 피드백에 따라 시간이 지날수록 내 자아가 얇아지고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독일에선 '아시안 여성'인 나를 CEO로, 매니저로, 사회의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 상상해 줄 사람이 없었다. 상상력에 쉽게 영향 받는 나는 그 요식업, 창녀, 아시아 수퍼마켓 직원, 마사지사에서 벗어나지 않는 편협한 공상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유럽의 아시안에 대한 상상력은 북미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훨씬 편협하다) 독일에서의 나는 그저 '아시안 여성'이기 때문에, 뛰어나도, 미친 짓을 해도, '아시안 여성'의 그들 머리 속 단 하나의 이미지에서 절대 멀리 갈 수 없었기 때문에. 한국에서 한 여성에게 아주 수많은, '똑똑한' '머리가 나쁜' '날씬한' '뚱뚱한' '예쁜' '못생긴' 과 같은 사회적 잣대가 갖다 붙는다면, 독일에서는 '아시안 여성' 단 하나의 태그가 붙어서, 한국에서의 자아에 붙어 있던 긍정적인 태그가 뜯겨나가는 건 그 만큼의 속박이 될 것이고, 부정적인 이름표가 사라진 자리는 홀가분할 테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공허가 나의 자아를 부서트리지만 않는다면, 그 거대한 공백 내가 나에 대한 재정의를 내릴 수 있게 하는 자유이기도 했다. 남이 내리는 얄팍한 정의 어디에도 내가 맞아 들어갈 공간이 없다면, 나는 나에 대한 정의를 내 힘으로 새로 써야만 했다. 내가 속하는 사회나 주변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내가 평생을 함께하며 가져갈 나에 대한 정의를. 아이러니하게도, 독일에 있으면 내가 상상한 나를 이룰 수 없을 것 같아 떠나기로 마음먹었지만 한국에 있었다면 수많은 정의에 둘러싸여 마음 가는 대로의 나를 상상하지 못했을 것 같았다.


구직은 잠깐 하다 관두었다. VR쪽은 미국을 제외하고는 잡 마켓 풀이 그렇게 크지 않았고, 개발 직군은 개발 베이스 없이 개발과 UX 어느 사이에 어정쩡하게 서 있었던 스킬셋 탓에 코드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했다. 조금 더 스스로를 셀링하는 법을 다듬고 프로그래밍을 공부한다면 재취직에 별 문제가 없을 터였는데, (코로나를 예상하지 못했던 시점이니까) 홈페이지를 만들고 잡을 찾아보고 커버레터를 쓰다가 문득 지쳤다. 주변인들은 다들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라는데, 적어도 회사에서 은퇴할 때까지 일하기가 내가 하고싶은 게 아닌 건 확실했다. 그럼 내가 하고싶은 건 뭐지. 난 항상 내 일이 하고 싶었다. 세계에서 살짝 비껴난 환상을 풀어내는 일. 언어 전달력이 부족해서 누구를 설득시킨 적이 없는데, 헛된 자신감인지 아님 설득되지 못할 만한 헛된 상상력인지 언젠가는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었다.


세상이 뭔지 모르던 어리버리한 예전에 비해 지금의 나는 세계에 대한 이해도도 사람에 대한 관찰력도 있었다. 자신감의 근거가 존재하는지 알아야 했다. 부딪혀보지 않으면 평생 모를 것이고, 해 본다면 금새 감이 올 것이 확실했다. 계속 할지 말지는 근거 여부에 따라 그때 가서 결정해도 될 터였다. 미련이 남지 않게 나의 가능성을 탐구해 본다면 무엇이든 손해가 될 리 없었다. 여태 지금까지의 삶이 그랬다. 그림그리기를 좋아했고, 외국어로 된 매체를 좋아했는데, 열과 성을 다해 사랑한 것들은 언젠가 내게 다시 돌아와 내 인생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저 사랑했던 것들은 보답을 바란 적이 없기에 더 고마웠다.


독일을 탈주하는 길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변수로 인해 아주, 아주 험난했다. 그래도 한국에 오고 나니 그 누구도 '왜 왔냐' '일은 어쩌고 왔냐'고 묻지 않는 건 생각지 못한 이득이었다. 모두가 '잘 왔다', '와서 다행이다'며 반겨주는 의외의 상황이 펼쳐졌다. 내 프로젝트에 얼마간 지원도 받기 시작했다. 비록 실업급여로 받았을 돈보다도 적은, 독일에서였다면 미디잡에 해당할 돈을 받고 있지만. 그리고 매일 작업시간을 적어 내고 교육 참가자 출석부를 제출해야 하는, 독일이었다면 프로그램 참가자 누군가는 반드시 인권 침해 및 불법이라고 항의했을 프로그램에 참석중이지만. 일단은 대도시에서 (그리고 인구 2.5 Milionen의 eine eher kleine Stadt에서) 5유로 가격에 김밥과 우동의 사치를 누리면서 내 선택이 어떤 미래로 나를 데려다 주는지 알아보기로 한다. 이 지점에 길게 머물러 있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최대한 현명하게 계획을 세우고 많은 것들을 챙겨 다음으로 넘어가야 한다. 귀찮아서 차마 열심히는 못 하겠다. 설렁설렁 대충 살아야지. 게임도 좀 하면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