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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 혜진 Jan 09. 2019

2-4. 오빠들.

오빠는 유학생이다. 학교를 다니지는 않지만 유학 비자 기간이 남아 있으니 공식적인 신분은 유학생이었다. 중학교 때 부모에게 떠 밀리듯 토론토에 왔다. 유학 와서 1년 공립학교를 다녔지만 그 성적으로 대학교를 갈 수 없을 것 같아 크레디트 스쿨로 옮겼다. 부모는 비전 없는 한국으로 돌아올 생각은 하지 말고 어떻게든 캐나다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해서 영주권까지 받으라고 했다. 제빵 공부를 하는 아는 형을 따라  칼리지에 가겠다고 했지만 아버지는 “돈 쳐들여서 유학 보내 놨더니 창피하게 고작 칼리지 가느냐" 하면서  4년제 대학을 가서 좋은 회사에 취직하라고 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4년제 대학을 갔다. 다 크레디트 스쿨 덕이다. 부모님이 좋아했다. 그러나 1년을 다니고 학교를 그만두었다. 공부에는 재능도 없고 하기도 싫은데 그나마 대학 공부는 너무 어려웠다. 1학년 때 벌써 낙제를 했지만 부모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졸업은 중요한 것도 아니다. 공부가 인생의 전부도 아니다. 부모는 아들이 학교를 졸업했는지 못했는지 알지도 못할 것이고 알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무슨 방법으로든 영주권은 받아야 한다.  스물여섯 살 전에 영주권을 받아야 군대를 안 갈 수 있는데  고작 4년 남았다. 그나마 비자 연장이 안되면 군대 연장도 안 되는 상황이라서 부모 몰래 칼리지로 진학해서 학생비자 연장을 할까 생각 중이다.  일찍 영주권을 받을 수 있다면  부모가 보내주는 학비를 모아서 카페를 차릴 생각이다. 일 년에 학비만 4~5천만 원 정도 되니  3년 치만 모아도 1억이 넘는다. 고생고생 공부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남들은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하고 영주권을 받겠다고 애를 쓰지만 오빠는 ‘ 한방’에 영주권 해결하고 편하게 살고 싶다. 오빠는 그 ‘한방’을 영이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영이가 영주권자라는 말을 듣고 자기 집에서 같이 살자고 제안을 했다. 


아는 형이 영주권자랑 결혼해서 영주권 받는 것을 봤기 때문에 잘하면 영이랑 결혼을 해서 영주권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영이는 다른 언니 오빠들 집에 이리저리 떠돌아다니지 않아도 됐다. 영주권 받는 데까지 2년 이상 걸리고 ( 2014년도에는 배우자 초청 수속기간이 2~3년 정도 걸렸다.) 영주권 받고도 2년 이상 같은 집에 살아야 한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러면 최소 3~4년은 영이가 묵을 집이 보장되는 것이다. 영이와 오빠는 서로 필요에 의해서 ‘합의’ 했다. 일 년 동안 같이 살면 혼인 신고를 하지 않아도 사실혼 관계가 인정돼서 배우자 초청을 할 수 있다는 말도 들었다. 그래서 영이와 오빠는 같은 집에 살기 시작한 것이다. 영이는 배시시 웃다가 정색을 하고 방은 따로 쓴다는 말을 힘주어했다. 어리광쟁이 내 둘째 딸 보다 겨우 한 살 많은 아이. 어디서 주워들은 얘기는 많네. 혼자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구나. 하지만.. 어쩌면 좋니…헛수고했구나. 영이야.


"배우자 초청은 혼인신고를 하지 않아도 일 년 이상같이 살고 영주권 후원을 할 수 있지. 하지만 양쪽 다 18세가 넘어야 한다. 지금은 안돼!”    


부모의 동의가 있으면 되지 않겠냐 거나 한국은 열여섯 살이 넘으면 부모 동의를 얻어서 결혼할 수 있으니 한국에서 혼인신고를 먼저 하면 영주권 신청이 가능하지 않겠냐 거나. 하는 얘기를 대꾸도 하지 않는 나를 옆에 두고 자기들끼리 했다. 내 반응이 시큰둥하고 별달리 뾰족한 수가 없어 보이자 투덜투덜 짜증을 내면서 돌아갔다. 영락없는 열여섯 살 철부지 아이의 뒷모습이 안쓰러웠다. 영이만큼 어리지는 않지만 군대에 끌려가야 하는 남자 친구를 위해서 영주권을 받게 도와주고 싶다는 아이들이 간혹 나를 찾아온다. 하나같이 남자 친구와 결혼해서 평생 살 것인지 확신할 수 없어도 당장 헤어지기는 싫다고 했다. 말할 것도 없이  부모에게는 비밀이다. 


캐나다는 동성 결혼이 합법적으로 인정되기 때문에 동성 친구끼리 찾아와서 배우자 초청 영주권 신청을 문의하는 경우도 있었다. 진짜 동성 커플인 경우도 있었지만 극구 동성 커플은 아니라고 힘주어 말하면서 단지 군대에 끌려가야 하는 친구를 도와주고 싶다는  가짜 동성 커플도 있었다. 눈물겨운 우정이다. 어떻게든 캐나다에 조금이라도 더 머물고 싶거나 군대를 가지 않을 방법을 찾는 아이들은 갖가지 방법을 찾아 헤맨다. 


영이는 그런 아이들 틈에서 부러운 능력자였다. 하지만 미성년자 불가 조항에 묶여 열여덟 살은 넘어야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그림의 떡인 셈이었다. 나는 그날 영이에게 매우 불친절했다. 그러니 또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몇 개월 후 영이가 다시 날 찾아왔다. 고객을 데리고 오면 커미션을 얼마나 줄 수 있는지 묻길래 적당한 선에서 생각해보자고 했다. 그리고 며칠 후 아이는 두 번째 오빠를 데리고 왔다. 


 두 번째 오빠는 토론토 대학교 1학년이었다. 공부를 열심히 했지만 토론토 대학교에서 4년을 버티는 것은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캐나다 대학교는 공부가 어렵다는 소문을 귀가 따갑게 들었다.  고등학교 때도 힘들었지만 열심히 했더니 성적이 잘 나왔으니 대학에 들어가서도 열심히 하면 버텨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까짓것  한번 해보지 뭐’ 하는 마음으로 토론토 대학에 들어갔다. 그러나 예상보다 더 어렵고 힘들었다. 토론토 대학교  입학 후  하루도 편히 자본적이 없다. 날마다 숙제는 산더미 같았고 수업을 하는 교수님의 말을 이해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토론토 대학은 1학년 때 절반 이상이 학교에서 쫓겨난다더니 쫓아낼 학생을 거르느라 교수들이 일부러 학생들을 혹사시키는 것 같다. 고등학교 때 아무리 성적이 좋았어도 토론토 대학은 함부로 가면 안된다는 것을 입학해서야 깨달았다. 


토론토 대학교 1학년 학생 평균 성적이 겨우 낙제를 면할 정도라더라. 그러니 낙제만 안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버텨 봤지만 어떤 괴물 같은 애들은 그 와중에 90점이 넘는 점수를 받는다. 경쟁 상대가 안 되는 애들과 한 교실에 앉아 있는 느낌이다. 조교들을 찾아 도움을 청해봤지만 큰 도움이 되지 않았고 해야 할 일도  줄어들지 않았다. 토론식 수업을 신청해서 별생각 없이 수업에 참석했다가 인생의 쓴맛을 봤다. 어릴 때부터 영어를 좋아했고 그만큼 열심히 했다.   


강남의 내로라하는 영어 학원을 다니면서 영어만큼은 현지인 못지않게 잘한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토론은 단지 영어를 잘한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토론식 수업에 들어가서 처음 알았다. 한국식 외우는 공부가 얼마나 편한 방식인지 깨닫게 되었다. 캐나다 제일의 명문 대학이니 어떻게든 버텨보고 싶지만 이러다 유급이라도 당하게 되면 비자 연장에도 문제가 생기고 어정쩡하게 한국으로 쫓겨갈까 두렵다. 대학교를 다니다가 갑자기 캐나다 생활을 접고 미국이나 한국으로 가버리는  선배들을 몇 명 봤는데 그때는 그들을 보면서 코웃음을 쳤었다. 뭘 몰라도 한참 몰라서 그랬던 거다. 대학교 입학이 쉬우니 방심했었다. 


론토 대학을 더 이상 다닐 자신이 없으니 궁여지책으로 미국 대학으로 옮겨 갈 생각이다. 미국은 캐나다보다 대학교가 다양하고 적당한 학교를 골라서 입학한다면 공부도 훨씬 수월하다더라. 부모에게 "대학은 역시 미국으로 가야 한다. 토론토 대학교는 유학생 학비가 미국 유명 사립 대학만큼 비싼데 미국 주립 대학은 학비도 훨씬 싸고 미국 대학을 나오면 취직하기도 좋다더라” 하면서 설득했다. 그래서 미국 대학으로 가기로 했다. 


이미 텍사스에 있는 주립 대학교 한 곳에 입학 허가도 받아둔 생태다. 학비도 토론토 대학에 비해서 절반 정도다. 그런데 영이가 미국으로 가려면 미국 비숙련 이민으로 영주권을 받고 가는 게 어떠냐고 권했다. 영주권을 받아야 군대도 안 가고 졸업 후 미국에서 취직하기도 좋을 테니 ‘믿을만한 장실장 님’에게 의뢰해서 미리 영주권 신청을 하고 가는 게 어떠냐고 했다. 두 번째 오빠가 나를 찾아온 사연이었다. 


나를 믿을만한 사람으로 봐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그보다 영이가  어떻게 미국 비숙련 이민을 알게 됐는지 궁금했다. 영이는 거리낌 없이 '전 남자 친구(X- boy friend)' 그러니까 첫 번째로 나에게 데리고 왔던 예한 씨에게 들었다고 했다. 예한 씨는 캐나다는 희망이 없다며 이것저것 알아보더니 미국 비숙련 이민을 신청했다. 그러더니 어느 날 집에서 나가라고 해서 ‘쫓겨났다’는 얘기를 심드렁하게 하면서 영이는 옆에 앉아 있는  새 남자 친구를 힐끗 쳐다봤다. 영이는 이번에도 자신을 버려두고 미국으로 떠나는 새 남자 친구와 무릎을 맞대고 앉아 미국 영주권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미국 영주권 수속 과정은 어떻고 준비할 서류는 무엇이고 영주권을 받은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시시콜콜 얘기하면서 내 눈치를 봤다.  설명하는 내용 중 틀린 것도 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아니라서  영이가 하는 대로 방해하지 않고 지켜봤다. 나는 영이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미소를 지으려고 애썼지만 쉽지 않았다. 결국 영이의 새 남자 친구는 미화 25000불짜리 미국 비숙련 이민 계약을 했다. 


노동부 승인과 영주권 수속 단계를 거쳐 ‘닭공장’에 가서 일 년 동안 일을 해야 한다. 영이는 몇 번 더 군대 가기 싫다는 오빠들을 데리고 왔다. 오빠들은 닭공장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내가 꽤 고단한 일이라고 설명하면 "고작 일 년, 고생 좀 하죠 , 군대에 끌려가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어요?" 했다. ‘믿을만한 장실장’을 진심으로 믿는 영이의 오빠들은 구구절절 묻지 않았다. 영리한 영이가 미리 '작업'을 충분히 했기 때문에 귀찮은 질문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손쉽게 건네받은 ‘미국 비숙련 이민’ 계약금 중 일부는 영이의 몫이 되었다. 


“예한 씨가 미국 비숙련 이민 신청해서 벌써 노동부 승인받고 영주권 신청했데요.” 영이가 오빠들을 데려와서 계약을 종용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사람들은 누군가 다른 사람의 성공 스토리를 듣고 자기도 같은 성공을 할 거라고 믿고 그 뒤를 따른다. 영이는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사람들이 듣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굳이 ‘타깃 마케팅’ 따위 어려운 말을 몰라도 영리한 너구리처럼 먹을 것을 잘 찾아냈다. 그 무렵 미국 비숙련 이민은 수속기간이 대폭 줄어들어 1년 만에 영주권을 받은 사례가  생겼고 이민 대행사들이 홍보에 열을 올린 덕에 신청자가 폭주했다. 때를 잘 만난 영이는 다른 어떤 아르바이트보다 많은 돈을 벌었다. 나는 영이 덕에 한동안 큰 수고 없이 군대 가기 싫은 ‘오빠’ 나 사연 많은 '언니' 고객을 유치했다. 


하지만 2016년 5월 이후부터 한국에서 비숙련 이민을 신청 한 사람들은 영주권 수속이 유보되었고 캐나다에서 진행 중이던 고객들도 최종 승인을 받지 못한 채 '홀딩 ' 상태가 지속되었다.  이민자에게 부정적 견해를 가진 트럼프의 계략인지 비숙련 이민을 신청한 한국 사람이 너무 많아진 것이 원인인지 아니면 닭공장에 가서  1년 이상 일을 하기로 고용 계약을 해놓고 약속을 지키지 않은 어떤 사람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이민 대행업체와 고용주 간 검은 거래의 꼬리가 밟힌 것인지, 소문만 무성할 뿐 원인도 해결책도 없이 수많은 이민 대기자들이 속을 끓이며 언제가 될지 모르는 최종 승인을 기다리고 있다. 그 사이 영이의 오빠들은 누군가를 원망할 겨를도 없이 하나 둘 캐나다를 떠나 군대로 가거나 겨울이 되면 영하 40도를 오르내린다는 멀고 먼 다른 주로 영주권 사냥을 떠났다.  영이도 나도 더 이상 미국 비숙련 이민으로는 돈벌이를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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