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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 혜진 Jan 09. 2019

2-5. 영이의 아저씨? 남편!


영이가 마지막 남자를 데리고 나를 찾아왔을 때는 열아홉 살 생일이 한참  지난 어느 날이었다. 이번에는 아저씨였다. 


“저 이 아저씨랑 결혼할 거예요. 이제 배우자 초청할 수 있죠? 저 열아홉 살 됐어요.”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매번 익숙해지지 않는 상황이었다. 동행한 남자는 머쓱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지만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작심하고 영이를 따라온듯했다. 


영이는 나와 ‘미국 비숙련 이민 장사’를 같이 할 때 수시로 배우자 초청의 자격과 준비할 것들에 대해서 물었다. 예를 들면 여자끼리도 가능한지, 몇 년마다 할 수 있는지, 필요한 서류는 무엇인지 같은 것이었다. 동성 결혼도 합법이니 여자끼리도 된다. 결혼해서 영주권 후원을 해주면  5년이 지나야 다시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매 5년마다 후원을 반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혼과 이혼을 되풀이하면서 영주권 후원을 했던 사람이 다시 이혼과 결혼을 하고 영주권을 후원하려다 이민국으로부터 퇴짜를 당한 사례가 있다. 결혼의 진정성이 의심된다는 이유였다. 


초청받을 상대방은 중대한 범죄기록만 없다면 영주권 받는데 큰 문제없다. 초청할 사람은 파산 신청 중이면 안되고 세금 보고한 기록이 필요하니 수입이 없더라도 세금 보고는 해야 한다. 다만 수입 없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결혼할 배우자와 살면서 생계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학생 신분이라서 직업이 없다면 부모가 보내주는 생활비로 두 사람이 사는데 문제가 없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이런 얘기를 해주면서 언젠가 한 번은 영이의 배우자 초청 영주권 수속을 내 손으로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영이가 만나는 오빠나 언니들 중 하나를 데리고 와서 영주권 받게 해달라고 하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스무 살 이상 차이나는 아저씨가 그 상대 일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영이의 상황으로 봐서 이십 년  아니라  사십 년 차이나는 사람을 데리고 온다 해도 어색할 일은 아니었지만 그런 일은 상상도 하기 싫었었나 보다.


“저 세금 보고도 했어요. 그래서 올해 온 거예요. 성인이 되고 일 년 기다려서 세금 보고하느라고..”   


영이의 아저씨는 ‘유학 후 이민’을 해보려고 생각 중이었고 대학에 가기 위해 어학연수 과정에 다니고 있었다. 캐나다 이민이 절실한 것은 아니었다. 남자가 스무 살이던 이십 년 전에 부모님을 따라 캐나다로 이민을 왔다. 캐나다에 와 보니 영어 배우는 것도 어렵고 달리 할 것도 없는데 결정적으로 캐나다는 재미없는 나라였다. 그래서 혼자 한국으로 돌아갔다. 친구들이 다 군대를 가는데 혼자만 안 갈 수도 없고 한국으로 돌아갔으니 당연하다 생각하고 다녀왔다. 


부모님 반대를 무릅쓰고 갔다 왔지만 지금 생각해도 잘한 일이다. 덕분에 한국에서 대학 나와 돈 잘 벌면서 혼자 자유롭게 잘 살았다. 부모님은 캐나다 시민권자고 이제 은퇴해서 사시는데 자꾸 캐나다로 오라고 해서 망설이다가 드디어 오게 된 것이다. 젊을 때는 캐나다가 재미없어 한국으로 돌아갔는데  마흔 살이 되니 재미있던 모든 일들이 힘들고 피곤 해졌다. 캐나다 영주권을 받을 수 있다면 받고 싶다. 부모님은 이십 년 동안 아들이 캐나다로 오기를 학수고대했으니 아들이 어떻게 하면 영주권을 받을 수 있는지  백방으로 알아봤다. 


장실장에게 상담도 했다 하더라. 자격이 합당한 고용주를 찾거나 대학원 가는 방법을 추천하셨다는데 고용주 찾기는 쉽지 않았고 이 나이에 토플 시험 봐서 대학원 가는 것은 더 피곤하고 어려웠다. ‘다행히’ 미혼이라서 결혼 상대를 물색했고 부모님이 결혼 정보업체를 통해 영이를 찾아냈다. 그래서.. 이렇게 됐다. 남자는 말하는 내내 리듬이라도 타는 듯 흥얼거렸지만 숫기 없고 차분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한국에서 무슨 재미를 쫒았을까. 아들의 영주권에 대해서 문의한 노부부. 누굴까. 


나를 찾아와 한국에 있는 자녀가 영주권을 받아서 캐나다에 올 수 있는 방법을 문의한 노 부부. 기억나는 분들이 몇 있었다. 가족 중 일부가 영주권을 받지 못했거나 받은 영주권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가 따로 살고 있는 이민자 가정은 꽤 많다. 기러기 가족은 예외로 두더라도 영주권 신청 당시 자녀의 나이가 22세가 넘으면  직계가족으로 영주권 신청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자녀만 유학생 비자로 따라와 다른 방법을 찾다가 실패하면 피치 못하게 생이별을 해야 했다. 내 오래 묵은 고객 중에도 부모가 동생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 간 후 혼자만 한국에 남겨져 외롭게 살았던 이가 있다. 아무도 없는 한국에 사는 것이 지루해진 여자는 일본으로 건너가 결혼까지 했고 그곳에서 10년을 살았다. 나이가 들수록 부모 형제가 그리워져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에 살고 싶어 졌다. 그래서 캐나다로 넘어온 40대 여자는 캐나다 영주권도 받지 못했지만 기회를 봐서 미국으로 가고 싶어 한다. 


그렇게 가족과  한 발자국이라도 가까운 곳에 살고 싶어 하는 남겨진 가족들도 있지만 본인의 결정으로 한국으로 돌아간 경우도 종종 있다. 결혼해서 한국에 살다 보니 아이들 교육 문제 때문에 캐나다에 오고 싶다거나 나이 들어 철들고 보니 가족이 그리워졌다는 사람들이  캐나다행을 감행 하지만 만만치 않은 이민 제도 탓에 갖가지 방법을 찾아 헤맨다. 


미혼 아들의 영주권에 대해서 문의한 어르신들이  몇 분 있었는데 비슷비슷한 사연들 중에 누가 남자의 부모인지 알 것도 같았다.  남자와 많이 닮은 조용하고 차분한 노신사 한 분이 몇 차례 방문해서 노트를 꺼내놓고 꼼꼼히 메모하면서 내 얘기를 경청했었다. 영이가 결혼하겠다는 아저씨의 아버지일 것이다. 틀림없었다.  


하나뿐인 아들을 두고 캐나다로 이민 와서 두 부부만 이십여 년 동안 살았던 이유를 넌지시 물었더니 김대중 정권이 들어설 무렵 곧 나라가 뒤집힐 것 같아 이민을 왔다고 했다. 말 안 듣는 아들이 한국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황망하기 이를 때 없었지만 그렇다고 아들을 따라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도 없었다. 곧 전쟁이 날 거라는 생각으로 아들이 도망 와서 살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다 보니 어느덧 이십 년이나 흘렀다는 의외의 대답을 했던 분이다. 


어느 날 불쑥 방문해서 아들을 빨리 데리고 와야 한다면서 다급해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땅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일산, 파주 일대와 청와대 아래까지 남침용 땅굴이 무려 80여 개가 넘게 있는데 요즘 부쩍 땅굴 파는 소리가 많이 들린다더라. 전쟁이 임박한 것이다. 그러니 아들을 서둘러 데리고 와야 하는데 아들이 말을 안 듣는다. 무슨 방법이든 찾아달라. 했다. “어머? 그래요?  큰일이네요..” 하는 내 반응에 신이 나셨던지 카톡 그룹 대화방에 올라온 사진과 동영상 하나를 내 눈앞에 디밀었다. 그리고 “장실장도 한국에 가족 있으면 지체하지 말고 데리고 오라” 했다. 농담 삼아 “모두 캐나다로 오면 나라는 누가 지키나요?” 했더니  정색을 하고 “이미 다 빨갱이 천지라서 지킬 필요도 없다.” 했다. 내가 “전쟁이 그렇게 금방 날 것 같지는 않다” 했더니 “안 나긴 왜 안 나요? 곧 전쟁이 날 겁니다. 북에서 치고 내려오기 전에 치고 올라가서 싹 쓸어 버려야지.” 했다. “전쟁이 나면 인명피해도 많을 테고 나라가 망할지도 모르는데 평화롭게 통일을 할 수는 없을까요?” 했더니 “ 평화롭게?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어요. 전쟁은 전쟁으로 끝내야 깔끔한 거요. 전쟁 나면 인명 피해는 어쩔 수 없어요. 싹 쓸어버리고 새 나라를 세우는 게 빨라요” 했다.  남자의 부모는 벌써 이십여 년 전부터 아니 어쩌면 훨씬 오래전부터 한반도에 전쟁이 날 걱정으로 밤잠을 설쳤을 테고 날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사는 것보다 피난을 선택했나 보다. 전쟁이 휩쓸고 난 후 전쟁공포도 분단도 없는 고향으로 돌아갈 꿈을 꿨을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캐나다에 잘 숨어 있으려 했겠지. 그런데 생각보다 빨리 전쟁이 나지 않았고 아들이 한국에 있으니 여전히 조마조마하게 마음 졸이며 살았겠지. 늙고 지친 몸으로 언제쯤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기다림이 너무 길어졌나 보다.  본인이 직접 총을 들고 전쟁에 나가 나라를 지킬 생각은 왜 안 했는지는 묻지 않았다.  


사람마다 다양한 이유로 한국을 떠난다. 그중에 전쟁의 공포는 의외로 조용하게 많은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전쟁 공포 때문에 재산을 다 싸들고 이민을 가겠다는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그중 어떤 이는 " 북한이 한 번씩 불바다 어쩌고 하면서 겁을 줄 때마다 한국사람들은 겁을 안 낸다며 외신들이  신기하다고 떠들에 대는데 한국사람들이 정말 안 무서워 조용히 있겠는가. 무섭다고 딱히 도망갈 곳도 없고 달리 방법이 없으니 될 데로 돼라 하는 심정으로 모른 척 사는 것이다" 했다. 정말 무서울 때는 내색도 못하는 법이다. 사람들 사이의 공포는 실체가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고 중요하지도 않다. 그 공포를 뜯어먹고 사는 누군가는 없는 땅굴도 만들어 내는구나 싶었다. 혹시 또 모르지. 어쩌면 동영상속 설명처럼 진짜 그 땅굴이 있을지도.  80여 개 나 되는 땅굴을 따라 인민군 부대가 조용히 쳐들어 오는 날이 온다면 나는 무릎을 치면서 “그 노인 말이 맞았구나.” 하겠지. 무서운 얘기다. 


누군가는 공포를 생산하고 누군가는 공포를 팔아먹고 또 누군가는 그 공포를 비싼 값을 주고 사들이기도 한다. 나. 나도 한국 사람들이 교육제도에 환멸을 느끼고  여자와 남자가 물고 뜯으면서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을 내고 을과 병끼리 내 탓 네 탓 편 가르기를 하다가 지치고 피곤해서 하루라도 빨리 '헬 조선'을 탈출하고 싶어 하고 미세먼지와 스모그 때문에 종말을 예감하고  전쟁의 공포 때문에 짐을 싸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밥 먹고 살기 좋아진다. 그래서 그들의 공포에 슬그머니 매운 고춧가루 같은 양념을 치기도 한다. 


어느 날 교환교수로 와서 토론토에 체류 중인  대학 교수라는 사람이 노인과 비슷한 말을 하면서 “ 미국은 왜 북한에 미사일 같은 걸로 선제공격을 하지 않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라고 말하길래 “ 남침용 땅굴이 80개나 있데요. 위로 공격하면 지하로 치고 내려올지도 모르죠.  북한 사람만 죽는 게 아닐 수도 있겠던데요?” 하면서 또 다른 공포를 재생산했다. 나도 ‘공포’의 덕을 볼 때가 있다. 


그러니 당장 쉴 집과 먹을 것이 없는 현실의 공포 때문에 스무 살 연상의 남자와 결혼을 하겠다는 영이를 말릴 핑계가 없었다. 다만 “부모님은 아시니? 이민국 서류 접수할 때 양쪽 가족들의 이야기를 곁들여야 이민관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텐데..?” 하고 물었다. 영이는 또 배시시 웃더니 “엄마한테만 말했어요. 며칠 전에 전화로 다 얘기했어요. 그랬더니 엄마가 ‘미친년’ 그랬어요. 그게 끝이에요. 웃기죠. 가 미쳤다는 건지 모르겠어요. 실장님도 제가 미친것 같으세요? “ 했다. 그러면서 아저씨인지 남편인지를 힐끗 쳐다봤다. 남자는 무덤덤하게 듣고 있었다.  장담컨대 영이는 미치지 않았다. 다만 안식처가 필요할 뿐이지. 


 서류 안내를 했다. 결혼식은 어디 가서 어떻게 하라고 세세하게 알려줬다. 영이는 내가 설명하기 전에 이미 무엇을 어디 가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다 알고 있는 눈치였지만 조용히 듣고 있었다. 남자는 궁금한 내용 몇 가지를 되묻더니 아버지처럼 꼼꼼하게 기록하고 “더 궁금한 것이 있으면  연락드리겠습니다” 하고 영이를 앞세워 돌아갔다. 영이는 그 남자와 시청 결혼식을 했다. 축복받아 마땅한 사랑하는 사람끼리의 결혼이었다면 하나뿐인 아들의 결혼식을 그렇게 소리 소문 없이 조용히 치르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에 뒷맛이 씁쓸했다.  두 사람 모두 특별한 결격사유가 없었으니 영주권 수속은 큰 무리 없이 진행됐다. 두 사람은 한집에 살았지만 그 결혼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묻고 싶지도 않았고 물어서도 안됐다. 오래 지나지 않아 영이의 ‘남편’은 영주권을 받았다. 그리고 어느 날  영이가 나를 찾아왔다. 통통하던 젖살이 빠져 성숙한 여자가 된 영이는 여전히 푼수 없이 배실배실 웃으면서 말했다.   


“ 노스욕에 작은 강아지 미용실을 열었어요. 놀러 오세요. 아저씨 부모님이 차려줬는데, 내 거예요. 이혼해도 내 거예요. “ 


영이가 왜 굳이 ‘이혼해도’라고 말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혼하기 위해서 결혼한 것이라고 해도 놀라울 것도 없었다. 곧 이혼을 한다고 해도 적어도 5년은 다른 사람에게 영주권 후원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상기시키려다 '설마, 그럴 생각은 아니겠지'하며 꾹 참았다. 강아지를 좋아하는 영이는 그동안 애견 미용 학원에 다니면서 일도 했다. 그리고 애견 미용실을 인수했다. 밥 먹고 사는데 문제없을 정도로 장사가 잘 됐다. 자라면서 내내 강아지를 키우고 싶었지만 형편이 허락하지 않았는데  마음껏 강아지를 안아볼 수 있다. 


나이가 어릴 때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으니 사는 게 힘들었는데 이제 나이가 들어 뭐든지 할 수 있으니 사는 게 재밌다. 돈 벌어서 여유가 생기면 다른 애들처럼 대한 항공을 타고 한국에 다녀오고 싶다. 기내식 사진을 찍어 인스타에도 올리고 싶고 강남역 지하상가에 가서 옷도 사고 화장품도 사고 싶다. 어릴 때 가족들과 같이 갔던  남산타워에 가서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고 싶고 롯데월드도  가고 싶다. 멕시코 칸쿤이라는 데도 가보고 싶다. 유학생 언니 오빠들이 여름 방학에는 한국에 갔다 오고 짧은 겨울방학에는 멕시코 칸쿤이나 플로리다 같은 곳으로 갔다 왔다. 영이는 그들이 올리는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속 사진들을 들여다보며 부러워하곤 했다. 이젠 열심히 일하면 언니 오빠들이 갔다 와서 자랑하던 그곳 어디든 곧 갈 수 있을 것이다. 영이는 아저씨가 알고 보니 한국에서 언더그라운드 락그룹에서 베이스 기타를 치던 사람이었다는 얘기를 하면서 숨넘어가게 깔깔 웃었다. 


 “ 직장 다녔다는 것은 다 거짓말이었어요.  베이스 기타 치는 것을 봤는데 정말 멋있어요. 요즘 어디 클럽 같은데 나가서 기타 친데요. 돈도 꽤 버는 것 같아요. 작곡도 한데요. 저는 그런 거 하는 사람 처음 봤거든요.”


“ 헐! 베이스 기타를 쳐? 의외다. 전혀 안 그렇게 생겼던데..?  락그룹은 머리도 길고 옷도 막 히피처럼 입고 그렇지 않니? ” 나도 호들갑스럽게 대꾸했다. 


“그렇죠 그렇죠. 저도 록음악 하는 사람들은 다 그런 줄 알았어요. 그런데 우리 아저씨는 클럽 갈 때도 보통 사람처럼 청바지에 운동화 신고 가요. 머리도 맨날 군대 가는 사람처럼 짧아요.” 하면서 또 숨넘어가게 깔깔깔 웃었다.


아저씨는 말이 없어서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 답답할 때도 있지만 어딜 가서도 큰소리 한번 안내는 순한 사람이고,  영이에게도 점잖게 대한다는 말에 슬그머니 안도가 되었다.  영이도 아줌마가 되었다. 오랜만에 만난 동네 아줌마 둘이서 미뤄둔 수다를 신나게 떠들어 댔다. 언니 오빠들이 영주권 때문에 고생하고 있다거나 새로 생긴 밥집에 어떤 메뉴가 맛있다거나 어느 교회에 무슨 일이 있다거나 강아지 미용실에 오는 아줌마들이 ‘영어도 못하면서’ 하나같이 왕싸가지 라거나 하는 이런저런 얘기를 숨넘어가게 떠들던 영이가 슬그머니 “실장님 당분간은 여기 안 와도 될 것 같아요. 그동안 감사했어요 ” 했다. ‘감사는 무슨.  내가 네 덕을 많이 봤지.  다시는 오지 마라 토론토 너구리 영이. 강아지들이랑 남편이랑 그렇게 매일매일 깔깔깔 웃으면서 살아라. 푼수 없이 밝은 뒷모습이 아프다.


이민자의 삶이 예상보다 버거워 부랴부랴 퇴각하다 보니 뜻하지 않게 흘리고 간 당신의 아이는 혼자 꿋꿋이 잘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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