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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나 Jul 14. 2019

우리는 ‘블랙’이 아니야

어느 날 에티오피아 친구가 말했다.


나는 한국에서 단 한 번도 하얗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여름이 되면 피부가 빨갛게 익는 사람과 까맣게 타는 사람이 있다는데, 나는 늘 후자였다.


어릴 때는 그 사실이 못 견디게 싫었다. 20대 초반에는 내 피부 톤보다 더 하얗게 화장했다. 21호 비비와 하이라이트, 미백크림은 필수였다.

그런 내가 에티오피아에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은

‘화이트’다.





헤이, 헤이! 화이트!


처음 에티오피아에서 혼자 길을 갈 때는 그게 나를 지칭하는 단어인 줄 전혀 몰랐다. 그리고 진짜 나를 부르는 말이 아니라는 것도 몰랐다.


흔한 캣콜링이었다.


아프리카에 간 동양 여자에게 이 정도 캣콜링은 일상이라는 것도 시간이 조금 지나서야 깨달았다.

순진무구했던 초반의 나는 해맑게 대꾸도 해줬다.


‘쌀람!(안녕!)’


몇 주가 지나자 이제 그런 단어쯤은 들리지 않는 척, 꿋꿋이 제 갈 길을 가는 경지에 이르렀다. 30분을 걸으면 10번은 족히 들렸다. 지긋지긋한 그놈의 화이트. 욕을 구시렁거리며 애써 무시하는 게 전부였다.



“세와예, 나는 여기 살면서 화이트란 얘기를 제일 많이 들은 것 같아.”

“알잖아. 그런 애들은 무시해버려.”

“알지. 아는데 짜증 날 때가 너무 많아.”


커피를 같이 홀짝이던 세와예가 문득 물었다.


“유나, 넌 우리가 까맣다고 생각해?”

“응?”

“그냥. 난 내 피부색이 참 좋거든. 이 마끼아또 같아.

 우리는 ‘블랙’이 아니야.”

세와예가 덧붙이며 웃었다. 그러더니 뜬금없었다며 다시 캣콜링 하는 길거리 양아치들을 욕했다. 나는 마시던 마끼아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자그마한 잔에 가득 담긴 마끼아또가 부드럽게 흐르고 있었다.


에티오피아식 마끼아또.




20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하얀 피부에 대한 집착을 점차 내려놓았다. 화장 자체를 줄이기도 했지만, 세와예의 말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 덕분이기도 했다.


스스로의 피부색이 참 좋다던 그 말.


내 까무잡잡한 피부색이 주는 건강한 느낌이 좋아졌다. 여름마다 햇빛에 노릇노릇 잘 구워지는 체질이라 생각하니 꽤 마음에 들었다.



에티오피아의 사람들

실제로 에티오피아인의 피부색은 커피색에 가깝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흑인의 이미지와 달리, 에티오피아인은 중동과 아프리카가 어우러진 모습이다.


에티오피아에 오기 전까지는 나도 당연히 아프리카에 사는 흑인은 다 똑같은 모습이라 생각했다. 세와예의 질문에 뜨끔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아프리카에는 54개의 국가가 있고, 12억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저 한 대륙을 지칭하는 ‘아프리카’라는 단어로 묶이기엔 너무 많고, 너무 다양하다.





이제 나는 ‘아프리카에서 살다 왔어요.’가 아니라,

‘에티오피아에서 살다 왔어요.’라 이야기하고 싶다. 커피 빛깔의 따뜻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일 년 내내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나라에서 살아서 행복했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다양한 빛깔로 빛나는 또 다른 아프리카 대륙의 나라들에서도 살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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