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식 마지막 차까지 남아 선배님 후배님 동기 놈들 다 택시 태워 전송을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피곤한
성격의 소유자인 나. 그리고 나와 성격이 똑 닮은 동기 녀석.
무사히 모두를 보낸 후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허름한 단골 포장마차로 빨려 들어가,
오뎅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서는 서로 딱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지겹도록 주고받던 멘트가
있었다.
“너도 참 징하다. 이 시간까지 걱정해주는 남친 하나 없냐.”
- 사돈 남 말하시긴. 그러는 너는 걱정해주는 여친 없으세요?
포장마차에 있을 때면 콩트 하는 배우들처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지겹도록 주고받던 멘트.
회식 날이면 꼭 재생되는 징글징글한 레파토리.
남사친, 여사친 이라는 그럴싸한 역할 명사가 생겨나기 전부터. 서로에게 그런 존재였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회식 날과 마찬가지로 회식 마감 조 자원봉사를 마치고 들른 포장마차에서였다.
녀석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고개는 또 한껏 삐뚝하게 꺾고선 날 한참 쳐다보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야.”
- 아 왜.
“야.”
- 아 그래 전화해주는 남친 없다! 됐냐!
“야 그게 아니고.”
- 뭐.
“안 되겠다. 너나 나나 이렇게 남 뒤치다꺼리나 하다 금세 마흔 되겠다.”
- 뭐래.
“마흔은.. 좀 그렇구 서른.. 그래 서른아홉 살 될 때까지 서로 애인 없으면 우리 그냥 인류애적인
마인드 로다가 결혼하는 거 어떠냐. 까짓것 내가 해줄게 불쌍한 것!”
- 헐.. 미친놈.
이라고 말했지만, 자꾸만 달아오르는 볼때기가 뜨거워서 혼이 났던 밤.
그날을 계기로 애인 없냐며 놀리던 멘트는 서른아홉에 결혼해주마 하는 선심 쓰기 멘트로 바뀌었고.
그렇게 계정 된 레파토리를 딸꾹 딸꾹 되풀이하며 시간은 잘도 흘러갔다.
그리고 까마득히 멀게만 느껴졌던 서른아홉이라는 나이가 어느새 엎어지면 코 닿을 만큼
가까워진 어느 날.
그러니까 며칠 전.
점심시간도 반납하고 보고서를 수정하고 있는데. 불쑥 누군가 다가와 책상 위를 톡톡 두드렸다.
낮게 흥얼거리는 멜로디와 비염 섞인 숨소리만 들어도 척 알지.
녀석이었다.
- 웬일로 내 자리엘 다..?
라고 말하며 고개를 드는 순간 시야에 들어온 봉투 하나.
새 하얀 봉투를 본 순간 혹시 하는 불안이 엄습했다.
그리고
봉투 입구를 봉하고 있는 하트 모양 스티커를 본 순간.
불안함은 역시나 하는 확신이 되었다.
“오빠 결혼한다!”
늘 그랬듯이 무심하고도 심드렁하게, 거 대박이네 하며 봉투를 집어 들어야는데
명치께 가 콱 막혀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당혹스러웠다.
결국 화가 몹시 난 사람의 표정으로 봉투를 낚아채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나와 버렸다.
/
그날 저녁.
사무실이 텅 빌 때까지 숨 죽이고 있다가
늘 가던 포장마차로 달음질을 쳤다.
오도카니 앉아 한 잔 두 잔 소주잔을 꺾으며, 테이블 너머의 빈 의자를 물끄러미 보았다.
명절마다 날아와 꽂히는 어른들의 결혼 재촉에 녀석의 말을 떠올리며 별 서러움 없이
화살들을 툭툭 뽑아낼 수 있었고.
이룬 것도 없이 외롭게 나이만 먹는다 푸념하는 연말 모임에서도 녀석의 말을 떠올리며 밀려오는
우울감을 능숙하게 밀어냈던 것이 사실이었다.
오늘 짝꿍은 늦게 오나보네 ?
라 물으시는 사장님에게 아네그게.. 라고 우물쭈물하며 어색한 웃음만 지어 보였다.
장난처럼 뱉은 녀석의 말에 길들여진 스스로에 화가 났고.
그런 말을 무시로 해서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든 녀석이 미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다
진흙탕 같은 전쟁터에서 많이 정주고 무척 의지하였던 전우를. 영영 잃은 것만 같아 몹시 슬퍼졌다.
‘남사친’ 이라는
그럴싸한 역할명사가 생겨나기도 전부터.
참 오랫동안 내게 그런 존재였던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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