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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ㄹim Aug 21. 2018

노래방 별곡 。














핸드폰이 요동하며 전화 왔음을 알린 건 밤 12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오랜만에 일찍 자볼까 하는 마음으로 작업 중이던 프로그램 창들을 닫고 있는데 



지잉. 지이이잉. 지이이이이이이징 



한밤의 핸드폰 진동 유발자는 다름 아닌 십년지기 친구 녀석. 


조용하고 진중한 성품의 친구는 일찍이 학문의 즐거움에 눈떠 벌써 여러 대학에 강의를 나가는 


인기쟁이 강사에 모교의 지원도 받는 촉망받는 연구원이다. 



'전화통화 가능하니?' 하는 선문자 후 전화를 걸던 평소의 그녀 답지 않은 


무작정 한밤중 전화라니.


'이 녀석 무슨 일이 생겼나 보다.. !'




친구의 전화를 받고 새벽 1시가 다되어 도착한 곳은. 대학로의 어느 지하 노래방이었다. 


근처 학교에서 진즉에 강의를 마쳤다던 친구는 생뚱맞은 시간에. 


그보다 더 생뚱맞은 장소에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한참 벌어졌나 보다 싶었다. 이런 상황은 나도 처음이라 무슨 말을 해야 하나 


눈을 굴리다 문득 시선이 닿은 곳이 노래방 기계의 타이머였다.


남은 시간은,  19분..!


기본으로 주어지는 60분 중 41분을 이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쭈뼛쭈뼛 아까운 시간만 좀먹었겠구나 생각하자, 


이럴 걸 알면서도 노래방을 찾을 수밖에 없었던 녀석의 마음을 어쩐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속상하고 안타까웠다.


에랏 모르겠다. 자초지종 들을 것도 없었다. 일단 놀고 보자. 너 그러려고 여기 들어온 거잖아 


그리고 나 부른 거잖아.




노래방 출입을 멈춘 지 어언 십여 년. 


하지만 중학교 삼 년 내내 '방과 후 노래방' 라이프를 실천하던 과거가 어디 갔을쏘냐.


제주도에서 결혼생활을 즐기고 있는 효리언니의 저스트 텐미닛부터 


마야의 진달래꽃 에초티의 아이야 까지. 본능적으로 기억하고 있던 추억의 노래들을, 


그야말로 미친애들 맹키로 방방 뛰며 부르고 또 흔들어댔다.


처음엔 쭈뼛쭈뼛하던 친구도 어느샌가 이성을 놓고 나와 한패(?) 가 되어 


광대처럼 마구 열정을 불사질렀다. 


절대로 19분이 아깝지 않게. 41분의 보상심리가 제대로 발동! 




19분을 새하얗게 불태운 두 여자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상태로 


지상(?)으로 올라와 근처 마로니에 공원을 향했다.


아르코미술관 옆 벤치에 앉아 캔맥주를 나눠마시며 시원히 부는 바람에 열을 식혔다. 


너 임마 평소 안 하던 짓을.. 라고 말을 건네려는 찰나,


친구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꾹 참아왔을 뜨거운 것이 


눈에서 퉁퉁퉁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일 년에 한 번은 꼭 만나는 고향 친구 남자애가 있었다 한다. 


어려서부터 그 남자애와 친했고


전공도 같은 분야에 취미도 같아서 참 많이 통하고 의지했노라고. 


친구가 서울로 대학을 왔을 때 그는 일본으로 유학을 갔고 그래도 그의 생일이 있던 8월이면 


그는 어김없이 고향에 들렀으며, 역시 때맞추어 고향집을 찾은 친구와 만나 밀린 회포를 풀곤 했다고.



일 년에 일주일 그렇게 열두 해, 열두 주의 추억.



서른세 번째 생일을 맞이하는 내년엔 본가에 잠시 다녀가는 게 아니라 아예 돌아와 정착할 거라 했다. 


내심 친구는 그 말에 안도했노라고. 


그렇게만 알고 있었는데 며칠 전 그에게서 메일이 왔단다. 


그리고는 친구는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가만히 핸드폰을 내게 내밀었다.


그가 보낸 메일 속 몇 줄의 텍스트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던 것은,


“나미 짱 ♡” 이라고 사인펜으로 흘려 쓴 느낌이 선연한 폴라로이드 첨부 사진 한 장.


"결혼한데. 가을에. 그래서 이제 생일은 도쿄에서 보낸데. 같은 학교 후배라나봐 나미 씨. 아니 나미..짱.”


자꾸 눈물이 흘러내려서 중간중간. 안 그래도 천천한 말투인데. 이 말을 다 마치는데


참으로도 오래 걸렸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다 내가 건넨 말이란 건 고작.


"이름도 무슨 볼펜 같은 게!! 이 남자애 정말 사람 보는 눈 없다야!! 내 눈에 네가 더 아까워야!!”


내가 생각해도 이건 정말 아니다 하고 뱉어놓은 말에 민망해하려는 찰나,


친구는 고개를 마구 저으며 말을 이었다. 미나 짱이 미운 것도 아니고 그 남자가 야속한 것도 아니란다.


그가 결혼 소식을 알렸을 때 그가 보낸 메일을 열어 메시지를 읽고 사진을 보고 너무도 자연스럽게


축하해! 라는 답장을 써서 전송 버튼을 눌렀는데.  그때였단다 바로 그때,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고.



거의 십 년 동안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때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고 했다.


누군가를 참 좋아하고 사랑했는데 그것도 모르고 있었던 스스로의 아둔함과 무신경함이


너무 화가 나고 미칠 듯이 괴롭다는 것이었다.


 

아. 내가 핀트를 잘못 맞추어도 한참 잘못 맞추었구나.


보통은.


연인의 변심에 슬퍼하고


연인의 악습관에 분노하고


연인과 내 차이점에 좌절하고


연인과 남의 연인을 저울질하느라


그렇게들 사느라 정신이 없는데. 이 녀석은.


누군가가 떠난 후에야 그 누군가가 자신의 연인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비극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비극이 없다.




노래방에서의 그날 밤 이후 몇 주일이 흘렀지만. 아직도 나는 하루에 몇 번이나


펑펑 울며 자신의 아둔함을 고백하던 친구 녀석이 떠올라 마음이 곧잘 먹먹해지곤 한다.


내 코가 석자라. 감히 어떤 위로의 말을 건네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만약 한밤 중 또다시 그녀에게서 SOS 콜이 온다면


암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쌩 달려가 정말이지 전보다 


더 혼신을 다해서 노래하고 춤출 것이다 다짐해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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