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ㄹim Nov 19. 2019

그럴싸한 역할 명사。













회식 마지막 차까지 남아 선배님 후배님 동기 놈들 다 택시 태워 전송을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피곤한


성격의 소유자인 나. 그리고 나와 성격이 똑 닮은 동기 녀석.


무사히 모두를 보낸 후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허름한 단골 포장마차로 빨려 들어가,


오뎅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서는 서로 딱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지겹도록 주고받던 멘트가


있었다.




“너도 참 징하다. 이 시간까지 걱정해주는 남친 하나 없냐.”


- 사돈 남 말하시긴. 그러는 너는 걱정해주는 여친 없으세요?





포장마차에 있을 때면 콩트 하는 배우들처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지겹도록 주고받던 멘트.


회식 날이면 꼭 재생되는 징글징글한 레파토리.




남사친, 여사친 이라는 그럴싸한 역할 명사가 생겨나기 전부터. 서로에게 그런 존재였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회식 날과 마찬가지로 회식 마감 조 자원봉사를 마치고 들른 포장마차에서였다.


녀석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고개는 또 한껏 삐뚝하게 꺾고선 날 한참 쳐다보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야.”


- 아 왜.


“야.”


- 아 그래 전화해주는 남친 없다! 됐냐!


“야 그게 아니고.”


- 뭐.


“안 되겠다. 너나 나나 이렇게 남 뒤치다꺼리나 하다 금세 마흔 되겠다.”


- 뭐래.


“마흔은.. 좀 그렇구 서른.. 그래 서른아홉 살 될 때까지 서로 애인 없으면 우리 그냥 인류애적인

마인드 로다가 결혼하는 거 어떠냐. 까짓것 내가 해줄게 불쌍한 것!”


- 헐.. 미친놈.




이라고 말했지만, 자꾸만 달아오르는 볼때기가 뜨거워서 혼이 났던 밤.


그날을 계기로 애인 없냐며 놀리던 멘트는 서른아홉에 결혼해주마 하는 선심 쓰기 멘트로 바뀌었고.


그렇게 계정 된 레파토리를 딸꾹 딸꾹 되풀이하며 시간은 잘도 흘러갔다.




그리고 까마득히 멀게만 느껴졌던 서른아홉이라는 나이가 어느새 엎어지면 코 닿을 만큼


가까워진 어느 날.


그러니까 며칠 전.



점심시간도 반납하고 보고서를 수정하고 있는데. 불쑥 누군가 다가와 책상 위를 톡톡 두드렸다.


낮게 흥얼거리는 멜로디와 비염 섞인 숨소리만 들어도 척 알지.


녀석이었다.




- 웬일로 내 자리엘 다..?




라고 말하며 고개를 드는 순간 시야에 들어온 봉투 하나.


 새 하얀 봉투를 본 순간 혹시 하는 불안이 엄습했다.


그리고


봉투 입구를 봉하고 있는 하트 모양 스티커를 본 순간.


불안함은 역시나 하는 확신이 되었다.



“오빠 결혼한다!”



늘 그랬듯이 무심하고도 심드렁하게, 거 대박이네 하며 봉투를 집어 들어야는데


명치께 가 콱 막혀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당혹스러웠다.


결국 화가 몹시 난 사람의 표정으로 봉투를 낚아채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나와 버렸다.





/





그날 저녁.


사무실이 텅 빌 때까지 숨 죽이고 있다가


늘 가던 포장마차로 달음질을 쳤다.


오도카니 앉아 한 잔 두 잔 소주잔을 꺾으며, 테이블 너머의 빈 의자를 물끄러미 보았다.




명절마다 날아와 꽂히는 어른들의 결혼 재촉에 녀석의 말을 떠올리며 별 서러움 없이


화살들을 툭툭 뽑아낼 수 있었고.


이룬 것도 없이 외롭게 나이만 먹는다 푸념하는 연말 모임에서도 녀석의 말을 떠올리며 밀려오는


우울감을 능숙하게 밀어냈던 것이 사실이었다.




오늘 짝꿍은 늦게 오나보네 ?




라 물으시는 사장님에게 아네그게.. 라고 우물쭈물하며 어색한 웃음만 지어 보였다.



장난처럼 뱉은 녀석의 말에 길들여진 스스로에 화가 났고.


그런 말을 무시로 해서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든 녀석이 미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다


진흙탕 같은 전쟁터에서 많이 정주고 무척 의지하였던 전우를. 영영 잃은 것만 같아 몹시 슬퍼졌다.




‘남사친’ 이라는


그럴싸한 역할명사가 생겨나기도 전부터.




오랫동안 내게 그런 존재였던 사람이었다.









이전 13화 생각보다 가까이에 。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