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ㄹim Jan 07. 2022

묻지마 리끼코 。






중학생 시절. 


잘 어울려 다니던 셋 중 한 친구의 집에 모여 신디더퍼키 쎄씨 등의 사은품이 후한


잡지들을 뒤적이며 시간을 보내던 오후였다. 그날따라 잡지 속지가 아닌 겉표지를


한참동안 응시하던 친구가 별안간 고개를 휙 돌리더니 강한 어조로 말했다.




애들아. 이런 잡지처럼... 우리도 이름 짓자! 어때?




여섯 눈동자는 동시에 반짝였고 흐트러진 자세들을 고쳐 앉아서는 바로 작명의 혼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때는 친구들끼리 모임에 이름을 붙여 소속감을 느끼며 지내는 것이


유행 아닌 유행이었더랬다. 




보보 어때? 

- 왠지 화장품 이름 같어..


신클지 어때? 너 신화 팬, 너 클릭비 팬, 나 지오디 팬 그러니까 신클지!

- 뭔가 입에 착 붙는 느낌이 없어..


애들아 그냥 투사모 어때? 투게더를 사랑하는.. 미안...




이러기를 두 시간.. 진즉에 바닥을 드러낸 애꿎은 투게터 통만 숟가락으로 쿡쿡 찌르며 한숨만


푹푹내쉬고 있던 그때. 거실에서 드라마를 보고 계시던 친구 할머니께서 우리를 향해 말하셨다.




야야 애들아. 정히 할 게 없으면 그냥 리끼코로 혀라. 너그들 이름으로 딱이여 이게.


- 리키코? 리끼꼬? 오~ 괜찮은데요?

  

할머니 이거 일본어예요? 뭔가 발음이 귀여워. 끼코 끼코 토끼 같아 헤헤!


- 지금까지 나온 거 중에 제일 낫다. 몰라 몰라 그냥 나는 이거 무조건 찬성!!




작명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세명의 여중생은 할머니께서 휙 던져주신 이름을 덥석 물고는


신이 나서는 리끼코~ 리끼코 ~ 를 외쳐댔다. 그도 그럴 것이 여태 나온 이름 중 이 만큼 유니크하고


입에 착 붙는 것이 없었던 것이 사실.


간만에 각 잡고 앉아 뇌를 풀가동하였더니 급속으로 허기가 몰려왔고 바닥난 에너지도 채우고


모임명이 생긴 것도 자축할 겸 라면을 다섯 봉 끓이기로 합의하였다. 한 명은 물을 올리고 한 명은 수저를


 놓고 한 명은 김치를 꺼내며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던 그때, 작명 멘토의 친 손녀이자 처음 이름 만들기를


제안했던 친구가 김치통 뚜껑을 닫다 말고 문득 할머니께 물었다.




할머니, 근데 리끼코가 뭐.. 어떤 의미가 있고 그런 말이야 ? 




할머니는 그걸 이제야 묻냐는 표정으로 쿡쿡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시며 답하셨다. 




너그 삼총사 공통점이잖여! 애기 코끼리같이 오통통한 종아리. 거꾸로 읽어봐야 ~  


- 애기 코끼리? 


- 코끼리 거꾸로?


- 코끼리. 리..끼.. 리끼코....!




 보이지 않는 손에 당수 치기를 씨게 당한 양 우리 셋은 한 동안 말을 잃었다.




뽀글. 뽀글. 뽀글. 




오직 라면 끓는 소리만이 정적을 뚫고 울려 퍼지고 있었는데


이 날 따라 그 소리가 끼들 끼들 거리는 얄미운 웃음처럼 들렸던 것은.  


기분 탓이겠지...


그날의 충격으로 한동안 모임명 에 대한 이야기는 누구도 입에 담지 않았지만


언제부터인가 셋을 묶어서 어필할 필요가 있는 순간이면


자연스럽게 리끼코를 모임명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십 년이란 시간이 흐른 지금.


매일같이 수다를 떠는 카톡방의 이름도, 매달 곗돈을 붓는 계좌 명의도,


언젠가 바닷가에 게스트하우스를 열자며 미리 만들어 둔 사업자명도 '리끼코' 인.


리끼코가 나 이고 내가 리끼코인 물아일체의 삶을 체험하며 살고 있다.




비록 미미하고 작디작은 사 모임이지만 


어딘가에 속해있다는 소속감과 오래된 셋의 연대감이


사회생활 중 사람 간의 온도차에 자주 감기 걸리는 나를 매번 구원하곤 한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사물이든 이름을 붙여준 모든 것에는


다소 귀찮고 버거운 책임이 따르기 마련이지만,


세월이 쌓이고 정이 깃들면서. 그들로부터


책임감을 상쇄하고도 남을 과분한 보답을 받는다는 것을. 




이제사 겨우 조금씩 알아 가는 듯하다.







이전 08화  종로 3가에서만은 。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