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해도, 그대의 사랑은 누구보다 거대했다.
한참을 굳게 입을 다물고 계시던 아버지가 어머니를 바라보며 이윽고 입을 여셨다.
"담배 한 대만 피우고 올게."
케케묵은 작업복에서 주섬주섬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셨다. 진한 먼지 냄새가 공기를 타고 무거운 공기를 짓누르는 느낌이다. 나는 여전히 답변을 기다리기 위해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을 옆에 앉아 계시던 어머니도 잠깐 자리에 일어나셔서는 화장실로 향하셨다.
<오늘 날씨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서울 지방은 날씨가 흐려지며 오후부터는 비나 눈 소식이…>
날씨 안내 앵커의 밝은 안내 멘트와 인사가 이어졌다. 인사와는 달리 날씨 예보는 좋지 못했고 당장이라도 비가 올 것처럼 밖은 서서히 어두운 구름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서쪽 하늘에서부터 짙은 검은 구름이 빠른 속도로 흘러 날아오고 있었다.
5분 정도 시간이 지나자 아버지와 어머니는 굳은 결심을 한 듯 거실에 앉아 내 주변에 앉으셨다. 그리고는 리모컨을 들고 TV 볼륨을 줄이셨다. 여전히 선뜻 말하기 어려운 모습이셨고 어머니께서 먼저 내 손을 두 손 잡아주시며 먼저 입을 여셨다.
"우리가, 아무래도 형편이 어렵잖니. 너뿐 아니라 네 동생들도 있고, 우리 다섯 식구 생각하면 지금은 어렵겠어. 네가 가고 싶은 건 알겠지만 지금은 안 될 것 같아."
맞는 말이다. 군 전역을 11월에 하고 이후 4개월간 열심히 돈을 벌어 자금 마련을 하고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가겠다고 공표를 해 둔 상태였다. 최저시급은 4500원 정도였는데 하루 12시간씩 꼬박 주 6일을 일해도 150만 원 이상을 벌기 힘들었다. 낮밤이 뒤바뀌고, 머리가 하얘질 정도로 하루 온종일 땀을 쏙 빼고 일하고 집에 오면 저녁 10시였다. 재빨리 샤워를 하고 부랴부랴 영어책을 폈다. 하루 24시간이 모자라다 싶은 생활이 이어졌다. 그러나 4개월이 지난 시점에 수중에 남은 돈은 200만 원 남짓이었다.
항공권 티켓 예약부터 홈스테이 비용, 그리고 일상생활비용 등 여러 지출들을 하고 나니 4개월이 넘은 시점에 남은 돈이 턱없이 부족했다. 이 돈을 가지고 외국으로 향하면 틀림없이 외국인 노동자밖에는 더 되질 못하겠다 싶었다. 그래서 출국 일정 한 달을 앞두고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딱 500만 원만 빌려주세요. 갚을게요.'
그러나 500만 원이란 큰돈이 어디 하늘에서 뚝딱 떨어지는 돈은 아니었다. 이해한다. 이해하려고 하는데 속은 쓰리다. 정말 피땀 흘려 일도 해봤고, 공부도 병행했는데 결론은 반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호주 워킹홀리데이는 택도 없게 끝나게 됐다. 실망스럽지만 어머니의 말이 이해가 됐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조금 마음을 추스를 시간은 필요했다. 이미 학교 복학을 앞둔 시기는 지났고 이제부터는 일 년간은 뭘 해야 할지 걱정이 앞섰다.
슬픔에 잠긴 눈빛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어머니는 그래도 어쩔 수 없다면서 고개를 돌리셨다. 부모의 마음이야 다 해주고 싶지만 형편이 되지 못한걸 무턱대고 다 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특히나 다섯 식구의 생계를 걱정하는 상황에서는 자식 한 명 만을 위해 무한정 희생해 줄 수는 없다.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날 무렵 아버지가 입을 떼셨다.
"여보, 우리 적금 부어놓은 거 있지. 500만 원. 그거 가지고 와바."
"그건..."
"아냐, 가지고 와봐. 이럴 때 쓰려고 모아둔 돈이야."
어머니는 흙갈색의 오래된 장롱 옷 깊숙이 숨겨 놓았던 통장을 주섬주섬 뒤지더니 통장을 가지고 오셔서 아버지께 주셨다. 아버지는 잠깐 통장을 바라보다가 손을 펴 보라고 하시더니 통장을 건네주셨다.
"이제부터는 네 돈이야. 그러니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써. 남자가 해보고 싶은 게 있으면 해 봐야지!"
망설임 없이 건네주신 통장에는 어려운 형편에도 차곡차곡 10만 원씩 모아 만든 500만 원이 찍혀 있었다. 왈칵 마음이 아렸다. 이토록 힘겹게 모으신 돈을 달라고 말씀드렸던 건 아닌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다.
"아버지 감사해요.."
"하고 싶은 일 하고 나서 후회하지 마."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안방으로 들어가셨다. 한참을 바라보던 어머니도 얕게 한숨을 내쉬더니 차라리 잘됐다며 고개를 끄덕이시다 안방으로 들어가셨다.
어린 시절 우리 집은 정말 찢어지게 가난했다. 두 부모님은 각자 대전 근교의 소도시에서 태어나서 살고 계시다 성인이 되시면서 대전으로 상경하셨다. 첫 취직 장소였던 대전 근교의 작은 공장에서 두 분은 만나셨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사랑의 결실을 맺었다. 두 분은 20대 초반 무렵 제법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하셨다. 30대인 지금 내 나이면 이미 초등학생 자녀를 둘 정도의 나이라는 게 새삼 믿기지 않는다.
더군다나 둘 다 너무 어린 나이에 결혼했기에 모아둔 돈도 각 집안의 형편도 넉넉지 않았기에 선택지가 없었다. 첫 신혼 가정은 대전 대덕구 오정동의 한 골목길이었다. 당시 근처에 외갓집이 있었는데 아버지께서 결혼을 하며 공장일을 그만두시고 할아버지께서 하시던 건축업을 도와 일을 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거쳐를 근처로 옮기셨다.
결혼 직전 건축 경제가 너무 좋아 크로스백을 매고 다니면 한 달 월급이 가방 안에 가득 채워질 정도로 많이 받았다고 너스레를 떨며 얘기하곤 하셨는데, 실제로 그랬다. 당시만 하더라도 경제 성장률은 하염없이 치솟고 있었고 은행 금리만 하더라도 12%에 육박할 정도였으니 '돈을 벌면 무조건 저축한다.'는 개념이 틀리지 않았던 시대였다.
그러나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외환위기가 찾아왔고 당시 시장 경제는 차올랐던 거품이 꺼지기 시작하면서 하염없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가계 생활도 어려워졌을뿐더러 시장은 대 혼란을 겪게 되면서 대다수의 직장인은 일자리를 잃고 돈을 벌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자리를 찾기 위해 뛰어다녔고 그마저 살아남은 사람들도 경쟁력을 잃고 설자리가 없어지는 건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다.
아버지는 대단하게도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항상 줄곧 가정의 중심을 잡아주셨다. 하루 동안 피곤함에 찌들어 있어도 집에 들어오면서는 항상 반갑게 우리 3남매를 보며 환하게 웃어주곤 하셨다. IMF 여파가 있었음에도 그 힘든 상황을 견뎌내셨고, 꼼꼼하고 열성적인 어머니와 함께 돈을 모아서 이듬해는 조그만 투룸 전세로 이사를 갈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어렵사리 구매한 스틱형 프라이드 베타를 타고 뒷자리에 앉아 드라이브를 즐길 때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쩜 저리 운전을 멋지게 하시는지 나도 꼭 얼른 커서 운전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옆자리에 앉을 기회가 있으면 너무 기분이 좋아 안전벨트까지 꽉 매고 앉아서 운전하는 내내 종알종알 떠들어대며 수다를 떨었다.
우리 아버지는 내게 있어 슈퍼맨이었다.
가족의 구성원이 하나 씩 둘 씩 늘어난다는 건 가장에게 있어 어깨의 짐이 겹겹이 늘어나는 것을 뜻한다. 그 고되고 무거운 짐을 지고도 아버지는 싫은 내색이나 힘든 내색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어린 마음에 "왜 우리 아빠는 집만 오면 잠만 하려고 해?"라고 따지듯 묻곤 했지만 어느새 훌쩍 커버려 그때의 아버지보다 더 많은 나이가 된 지금 그때의 그 말 하나가 너무나도 죄송스럽다.
수중에 있던 200만 원과 부모님께 받은 500만 원을 합쳐 만든 700만 원 중 반절은 어학원 학비로 일괄 결제했다. 그리고 나머지 중 일부는 가기 직전 준비 과정에 필요한 비용이나 학원비용 그리고 현지에 가서 생활해야 하는 생활비까지 필요했기에 넉넉하지는 않은 돈이었다. 2011년 4월 25일 출국을 하면서 수중에 있던 돈은 250만 원이 채 되지 못했고 불안함과 초조함이 깃들어 있었다.
생에 처음 가는 외국을 아무도 알지 못하는 나라로 떠나면서 호기심이었는지, 아니면 과한 자신감이었는지 지금도 알 수 없지만 호주 생활은 정말 다사다난했다. 영어 한마디도 못해서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벙어리가 되어버려 좌절감을 맛보기도 수차례. 어떻게든 현지 직장에서 직업을 구해보겠다며 하루 열 시간도 넘게 발품 팔면서 이력서를 뿌리며 74번째에 현지 패스트푸드점 아르바이트 잡을 구했던 적도 있다.
그리고 정말 감사하게도 지금은, 그 소중한 경험과 노력들을 토대로 영어를 즐겁게 사용할 수 있는 직업을 구해 너무나도 알차고 감사하게 보내고 있는 요즘이다.
나는 여전히 9년 전 그때의 아버지의 눈빛을 잊지 못한다. 나의 먼 미래 자녀가 나와 같은 말을 한다면. 혹은 같은 상황을 맞닥트리게 된다면, 적어도 아버지와 같은 결정을 해야겠다 다짐한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단 한 번도 아빠한테 사랑한다 고맙다 말을 못 했어. 그런데 그 감정은 고스란히 담겨 해가 지날수록 그때의 고마움은 배가 되어 마음속 열매를 맺듯 더 커져만 가더라. 당시 생각했던 그 감정은 여전히 남아있어. 당시 아빠를 보고 많이 배웠던 나의 모습이 너무 귀해, 시간이 흐른 지금 그때의 기억이 더욱 소중해. 아빠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