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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이랑 Feb 01. 2024

나 어릴 적에는


나 어릴 적에는 공공 도서관이 없었다. 내가 살던 주변에는 없었다. 학교에는 도서관이 있었을까? 기억이 없다. 학급문고는 있었다. 학급문고에서 더 이상 빌릴 책이 없을 때에는 친구들 책을 빌렸다.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우리 마을로 같은 또래의 여자아이가 도시에서 내려왔다. 아예 내려온 것이 아닌 잠시 내려왔는지 어느 사이에 다시 이사를 갔다. 그 여자아이 집에 놀러 간 적이 있었다. 그 아이만의 책장이 있었고 전집이며, 시리즈로 된 책이 빼곡했다.


그 아이의 책장에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스 시리즈를 만났다.


내가 그때 그 여자아이의 얼굴 표정까지 잘 살폈는지 기억은 없다. 내 눈에는 오로지 책장과 책이 보였고, 코난 도일의 책을 빌려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여자아이는 내가 셜록 홈스 시리즈를 한 권 한 권 빌리러 갈 때마다 선뜻 방문을 열고 빌려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 기세에 눌려 어쩔 수 없이 빌려줬던 것 같기도 하다. 그 아이와 별다른 특별한 대화를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뜻하지 않게 그 아이는 나의 개인 도서관이 되고 말았다. 나는 맹렬한 속도로 셜록 홈스 시리즈를 읽어나갔다. 모두 몇 권까지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권수가 꽤 많았고, 나는 짧은 기간 안에 시리즈 끝까지 다 읽었다. 집에서 읽은 기억보다는 학교에 가서 책상에 펴고 읽었던 기억이 선명하다. 중학교 1학년 때는 학교 친구들과 난리가 아닐 정도로 가깝게 지냈다면 중학교 2학년 무렵부터는 책읽기에 빠져들었다. 나는 이 시기를 기점으로 아주 오랫동안 탐정, 추리물에 빠져지냈다.


아무래도 도시에서 잠시 우리 마을에 내려온 아이 덕분인 것만 같다. 아니 그 아이 덕분이다. 그 아이는 무슨 사정으로 갑자기 우리 마을로 내려왔던 것일까? 그 아이는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그런데 나는 개인 도서관이 되어준 그 아이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내가 그 아이한테 그래도 당당할 수 있는 점은 내가 빌린 책은 단 한 권도 빠짐없이 그대로 다 돌려주었다는 것뿐이다. 아마 반드시 돌려달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빌렸으면 돌려줘야만 하는 도서관처럼. 나만이 아닌 그 누군가 또 다른 아이의 영혼을 돌보기 위해. 


무심코 내 책장의 책들을 둘러본다. 이 속에 그 누군가가 탐내는 책이 있다면 좋겠다. 그 존재에게 선뜻 내어주며 그에게 귀한 책이 되었으면 좋겠다. 때로는 나도 누군가의 개인 도서관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다시 내 책장에 꽂혀있는 책 한 권 한 권을 바라본다. 내 책장조차도, 주변에 변변한 공공도서관도 없었던 때를 생각하면 아아, 책 참 많다, 도서관 참 많다 하며 감탄한다. 어떤 책들은 책을 쓴 작가 선생님들도 알고 지낸다.  어릴 적의 나를 생각하면 참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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