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제목이《도서관》이다. 글을 쓴 작가와 그림 작가가 각각 다르다. 두 작가의 콤비로 칼데콧상을 수상한《리디아의 정원》이란 작품도 있다.
그림책《도서관》은 책을 엄청나게 좋아하는 엘리자베스 브라운이라는 여자아이 이야기다.
빨간 머리에 눈이 나빠 안경을 쓴 엘리자베스 브라운은 동네 아이들이 햇살 속을 뛰어다닐 때에도 집 기둥 난간에 앉아 책읽기 삼매경에 빠져있다.
아침부터 잠들 때까지 엘리자베스 브라운 곁에는 언제나 책이 함께 한다. 엘리자베스 브라운은 책을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읽었고, 읽는 속도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다. 그림책 속 곳곳에 놓여있는 엘리자베스 브라운이 읽은 책의 두께 또한 장난이 아니다. 모든 게 나와 반대다. 난 어렸을 때 난독증이 있어서 글을 잘 못 읽었고, 중학교 때 속독법을 배웠으나 전혀 빠르지 않았고, 두꺼운 책은 엄청 시간이 걸린다. 주변에 단번에 책의 핵심을 파악하고 엄청난 속도로 읽어내는 분들을 보면 경외심과 존경심이 밀려온다.
언제나 주변에는 책을 좋아하고 일상 속에서 항상 책을 가까이하는 친구들이 많아서, 그들과 함께 어울리다 보면 나도 책을 안 읽으래야 안 읽을 수가 없다. 그러다 보니 이제 할 줄 아는 게 책이나 자료, 글과 관련된 일이다.
그림책에는 표지부터, 면지, 속표지, 장면장면마다 책이 빠짐없이 등장한다. 엘리자베스 브라운은 일종의 책 중독자이다. 엘리자베스 브라운은 물구나무를 서면서도, 걸어가면서도, 장을 보면서도, 청소를 하면서도 책을 본다.
비 오는 날 우산을 쓴 채 책으로 얼굴을 가리고 엘리자베스 브라운이 길을 간다. 빗방울이 빨간 머리카락에도, 옷에도, 책에도, 그림자에게까지 내리꽂혀도 개의치 않는다.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말은 더 심오하게 쓰이지 이럴 때 쓰는 말은 아니지만, 마치 책 속에 길이 있듯이 엘리자베스 브라운은 앞을 보지 않고도 발걸음 당당하게 걸어간다. 책이 엘리자베스 브라운의 얼굴을 대신한다. 엘리자베스 브라운에게 책은 그녀의 정체성인 것이다.
마침내 엘리자베스 브라운의 집은 책에게 점령당하고, 책을 단 한 권도 살 수 없는 상황에 봉착하고 만다. 이때 그림책의 제목이기도 한 “도서관”이 드디어 등장한다.
나, 엘리자베스 브라운은 전 재산을 이 마을에 헌납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의 고야스 씨가 자신의 전재산을 헌납하여 그 지역을 대표하는 도서관을 만든 것처럼, 엘리자베스 브라운 또한 책만이 아닌, 자신의 전 재산을 마을에 헌납한다. 이 정도가 아니고는 책만 기증만 한다고 해서 국가적으로도 세계적으로 중요한 작가가 아닌 이상 기존의 운영 체계 속에서 돌아가고 있는 도서관이 책을 받아줄 리 없다. 엘리자베스 브라운은 자신이 읽은 책들이 공공재로 환원되고 존재할 수 있도록 자신의 전 재산을 내놓아 도서관을 건립한다. 엄청나다.
그림책에서는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엘리자베스 브라운은 아무래도 유산이 있었나 보다. 아니면 책을 통한 그 풍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타 강사였나보다. 그림책에서 엘리자베스 브라운은 기숙 학교를 다녔고 기차를 타고 가다가 길을 잃고 잘못 내린 곳에서 정착해 집을 마련하고 아이들을 가르치며 생활했다고 나온다. 그곳에서 소문난 강사 생활을 하셨나보다. 어찌되었거나 태생부터가 책을 읽고, 사고, 모을 수 있는 특성과 조건을 갖춘 인물인 것은 틀림없다.
거처할 집이 없어진 엘리자베스 브라운이 만년을 어떻게 보내는지에 대해서는 현물 그림책을 통해 확인했으면 하는 바람인데, 그래도 한 마디 한다면, 엘리자베스 브라운은 아주 행복한 노년을 보낸다. 이보다 더 부러울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