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리고 소프트 아이스크림

이수지, 『토끼들의 밤』(책읽는곰, 2013)

by 강이랑

<그림책 한번 읽어볼까?>

이수지의 『토끼들의 밤』


이수지의 『토끼들의 밤』은 글 없이 그림만으로 된 그림책이다.


글 없는 그림책이지만 딱 한 군데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곳에 수수께끼 같은 이미지와 글이 있다. 한적한 흙길 위를 색상 화려한 아이스크림 차가 지나간다. 양 옆은 초록 수풀이 무성하고 그 길 위에 토끼 한 마리가 누워있다. 그리고 아래에 “어느 뜨거운 여름날…….”이란 글이 적혀 있는 장면이다. 어느 뜨거운 여름날,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짧은 세 단어 다음에 이어진 “…….” 또한 해석해야 될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토끼들의 밤』을 읽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이다. 신기하게도 처음 읽었을 때와 전혀 다른 이야기로 다가왔다.


막 출간된 2013년 즈음에 이 그림책을 보았을 때는 로드킬 피해를 입은 토끼와 토끼 친구들의 역습 이야기로 읽혔다. 프롤로그에 그려진 길 위에 누워있던 토끼 이미지의 영향이 컸던 것일까. 길 위에 드러누운 토끼 이미지는 본문에서 아이스크림 차 운전자가 토끼와 똑같은 모습 그대로 도로 위에 누워있는 장면으로 다시 되풀이된다.

그래서였을까. 친구를 잃은 토끼들이 아이스크림 차를 향해 돌격해 운전자의 혼을 쏙 빼놓으며, 아이스크림 차를 역습하고 반격을 가하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이야기”로 읽었던 것 같다. 게다가 아이스크림 차가 지났던 길은 실제로 토끼들이 자주 출몰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 그림책에 쓰인 유일한 문장인 “어느 뜨거운 여름날…….”에 감정 이입이 되었다. 그러자 전혀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엄청난 열기로 푹푹 찌는 한여름 밤, 폭염에 지친 토끼가 길가에 누워있고, 아이스크림 차를 목격한다. 때는 새빨갛게 석양이 저무는 무렵이다. 판타지가 일어나기 좋은 시각인 것이다. 석양빛 아이스크림 차 측면에는 2단으로 올라간 콘 아이스크림, 유쾌한 피에로, 화려한 별과 달이 그려져 있다. 아이스크림 차 정면 위 양쪽에는 커다란 소프트 아이스크림이 그려져 있다.

칠흑 같이 어두워진 밤길, 환하게 라이트 불빛이 비추고, 그 불빛 속으로 토끼 한 마리, 토끼 두 마리, 토끼 열 마리가 춤을 추듯 공중을 날아다닌다. 수풀 속에서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많은 토끼가 이를 지켜보고 있다. 그리고 흙길 위로 즐비하게 내려선 토끼들, 토끼들, 토끼들. 아이스크림 차가 향하는 길 위를 꽉 메우고 있다. 운전자 입장에서 보면 공포가 따로 없다.


이 그림책에서 그믐날 밤, 퀭하고 그로테스크한 모습으로 날아오르는 토끼들 장면은 압권이다. 이들 토끼들이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 소프트 아이스크림이다. 그리고 토끼들은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손에 쥔다.


10여 년 전에 처음으로 이 그림책을 보았을 때 내가 놓친 결정적인 이미지 중 하나가 바로 “소프트 아이스크림”이다. 새삼스럽게 지금 다시 보니, 소프트 아이스크림 이미지는 아이스크림 차 정면 양쪽에 그림자를 드리울 정도로 너무나 입체감 있게 그려져 있다.


한여름 무더위 때 한 손에 쥐고 먹는 부드럽고 상큼한 소프트 아이스크림. 무더위에 지친 고단함이 한순간에 가시고, 피로가 풀린다. 지친 심신이 회복한다. 굳이 프로이트의 구강기까지 가져올 필요가 없을지 몰라도, 하루 종일 토끼처럼 뛰고 난 날의 달콤한 소프트 아이스크림은 어쩌면 그 시기의 맛과도 비견되는 것은 아닐까.

나는 한 권의 그림책에서 생과사의 전혀 다른 극과 극의 감상을 느낀 나 자신의 독후 체험을 경험하면서 한 권의 그림책 안에 얼마나 다의적인 느낌이 존재하는가를 새삼스럽게 실체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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