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에 새겨진 노래, 나의 것

이것은 내가 놓칠 수 없는, 놓치면 안 되는 것이었다.

by 모도 헤도헨

교회에서 성당으로 옮긴 이후, 딱 한 번 다니던 교회에 갔다. 내가 세례 받았던 주일 바로 전 주였다.


내가 교리반에서 성지순례에 가던 날, 교회는 이사를 했다. 계약기간이 만료되어 오랜 고민 후 드디어 한 곳을 찾아 들어간 것이었다. 교인이 스무 명 남짓한 교회라, 남편과 아이들은 이사를 돕느라 분주했다. 첫째가 영상통화를 걸어서, 새 교회라며 쭈욱 보여줬다. 그 모습을 갈매못성지 한쪽에 앉아서 보며, 이곳이 아니라 저곳에 있어야 마땅했을, 아니 적어도 저곳에 있었을지 모르는 나의 사라진 현재에 머리가 잠깐 지끈거렸었다.


한 달쯤 지나 '입당예배'를 드리기로 했다. 감사하는 의미로, 또 한편 축하하고 축복하는 자리로 많은 사람을 초대하는 모양이었다. 남편이 오겠냐고 물었을 때 생각이 많아졌다.


가벼운 마음으로 가서 축하할 수도 있는 것이었으나, 아주 사소하고 미묘한 오해도 불러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나는 성지순례 이후 성당에서 세례 받기로 마음을 정했고, (적어도 당분간) 돌아갈 생각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자다가도 떠오르는 교회의 어떤 점, 어떤 사람들에 대한 속상함이 보지 않음으로, 관계를 끝냄으로 겨우 나의 것이 아니게 되었는데, 다시 건들고 싶지 않았다. 오랜만에 나타난 나에게 이제 그만 돌아오라는 식의 언어적, 비언어적 메시지를 받는다면, (그리고 내막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어디서부터 답해야 할지 모르는 질문을 받는다면) 대충 얼버무리는 걸 못하는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 것인가. 다른 자리도 아니고, '입당 축하예배'라는 명목이 확실한 자리에서, 이런 류의 피곤함과 불편함은 확실히 서로에게 불필요한 것이었다.

이후 가깝게 지내던 권사님과 통화 중에 입당예배에 오라는 권유를 들었을 때는 완곡하게 거절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입당예배를 준비하느라 아이들이 합창을 연습하기도 하고, 소소한 준비를 도우면서, 엄마도 오라고 자주 말했다. 교회에서 우리가 준비한 것을 보러 오라는 그 단순한 초대에, 나의 그 복잡한 마음은 초라한 변명이었다. '축하하러' 가야겠다, 나 역시 단순하게 응하기로 했다.





교중미사를 드린 후 S언니와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산책 겸 내가 다니던 교회 쪽으로 같이 걸었다. 나의 목적지를 아는 언니는 길치인 나를 교회가 보이는 곳까지 마중해주고 헤어지면서, "넘어가면 안 돼~" 하고 농담처럼 말했다. 나는 웃었다. 그럴 리가.


교회 건물 앞에는 나이 드신 남자 권사님과 집사님 세 분이 서서 안내하고 계셨다. 내가 그 앞으로 가니 (놀랍게도) 별다른 놀라움 대신, 얼마 전 만난 사람에게 할 만한 반가움을 표하며 들어가라고 하셨다. 오호. 첫 난관을 쉽게 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건물로 들어섰다. 어쩔 수 없이 떨리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진정하고 싶어 3층까지 걸어 올라갔다.


2층과 3층 사이 마지막 몇 계단을 오르는데 내 모습을 본 셋째가, 그러니까 엘리베이터 앞에서 목을 빼고 기다리던 일곱 살 셋째가 큰소리로 외쳤다.


"엄마 왔다! 언니들~~~!!! 엄마 왔어!!!!!"


온 복도가 울리게, 마치 세례 요한처럼(농담입니다...) 외치고는 다시 내 쪽으로 달려와 와락 안겼다. 이어서 첫째와 둘째도 뛰쳐나왔다. 교회 문 앞에서 맞이하던 집사님들도 얼떨결에 살짝 과하게 환영하는 얼굴이 되었다.


교회 안으로 들어서니, 나를 본 집사님과 권사님들은 오랜만에 친척을 만난 듯이 반갑게 웃으며 손을 잡거나 꽈악 안아주었다. 나는 어쩐지 이것저것 재고 피하려고 했던 내 작은 마음이 들킨 것만 같아 부끄러웠다. 그리고 분명 처음 오는 낯선 장소지만, '내 사람들', '내가 속했던 공동체'가 있기에 고향에 온 것 같았다(10년을 매주 만난 것이다. 내 가장 힘든 시기를 포함하여). 익숙하고 따뜻하고 반갑고, 심지어 어떤 흥분까지 나를 감싸서 어쩔 줄 몰랐다.


작은 교회가 손님들로 들어차 있었다. 아이들이 나를 위해 맡아둔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청년들이 예배 전 찬양을 이끌고 있었다. 이 자리로 인도해주셔서 감사하다는, 성전에 오면 늘 하던 기도를 하는데 말을 잇기 어려웠다. 고향에 와서 친척들의 환대를 받는 기분이었고, 나도 반가웠다. 그런데 이 정겨운 사람들을 두고 난 떠나버린 거니까 왠지 미안하고 부끄러웠다.이 마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그 와중에 귀와 내 몸을 울리는 찬양은 내 입에도 맴돌았다.


그동안 한낱 인간인 주제에, 교회를, 하나님의 일꾼을 비판했던 입술을(그래봤자 남편에게 한 게 다지만), 미워했던 마음을 회개했다. 그런 생각과 마음이 드는 거야 그럴 수 있는 일이지만, 다시는 정죄하듯 입 밖으로 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목이 메어 기도를 멈추는데, 계속해서 들리는 찬양은 내 몸이라는 물리적 경계를 뚫고 들어왔다. 마치 다음 기도처럼 찬양이 나왔다.





성당에서 미사를 드릴 때 여러 가지가 새로웠다. 그것은 보통, '교회' 그리고 '예배'와 이렇게 다르구나, 하는 비교에서 오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본당 안에서 사람들의 조심스러운 움직임, 조금은 무채색 같은 분위기가 그러했고, 드러나지 않는 것이 미덕인 것으로 합의된 것처럼 짜인 모든 진행이 그랬다.


전례는 사회자의 인도에 따르는데, 그 사회자가 누구인지,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한쪽에서 목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보편지향기도를 대표로 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신부님을 돕는 복사들이나 말씀을 읽는 사람들도 제단에 올라가는데도 불구하고 유니폼 같은 옷을 입고(여자는 미사보까지 쓰고) 있기 때문에, 개성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기도문, 말씀도 (어조가 드러나지 않게) 운율이 있는 듯 읽는다.


나는 개인적으로, 굳이 말하자면, 이런 부분이 맞았다. 이런 문화와 분위기가 나를 편안하게 해주었고, 나 역시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신 앞에 겸손하고 경건한 자세로 들어가는 데 도움을 주었다.

성가를 부르는 것도 비슷했는데, 일반 성도들이 자리에서 다 함께 부를 때, 성가대가 선창처럼 나누어서 혹은 같은 부분을 리드하듯 불렀다. 2층 자리에서, 보이지 않게. 그래서 굳이 뒤돌아 올려다보지 않으면 그들을 볼 수 없다. 성가대의 특송도 그냥 그 자리에서 소리만 들리게 할 뿐 아니라, 미사 직전 (3분 정도) 후렴구를 연습해서 일반 신자들도 같이 부른다.


*내가 다니는 성당만 이런 것인지, 다 이런 것인지, 아니면 대략은 이런 정도인지 아직 잘 모르겠다.


그래서 성가 부르는 시간이면, 어떤 영화에서 보듯 장엄하고도 경건한 화음이 그 공간에 울려 퍼졌고, 나는 가만히 엄숙해지고 기도하는 마음이 되곤 했다.


하지만 성가는 어찌 된 일인지 개신교에서 부르는 찬송가와 달랐다. 한 번의 미사에 5-10곡 정도 부르는데, 1년 남짓 다니는 동안 내가 아는(번역은 다르게 된) 노래는 서너 곡이 전부였다. 참고로, 교회 다닐 때는 언제 어느 곳에서 예배를 드려도 모르는 찬송을 만나는 건 1년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였다. 그러니 내가 아는 찬송 자체가 적어서 교집합이 적은 건 아닌 것 같다.


찬양을 부르는 걸 좋아하는 나는, 성가 시간에 악보를 보며 함께 부르려고 애써 보지만, (이것 역시 우리 성당만 그러는지 모르겠는데, 어떤 곡이든 2절까지만 부르기에 좀이라도 익숙해져서 따라 부를라치면 끝나버렸다) 아직도 립싱크 수준이다. 입당예배에 갔던 그 무렵에는 특히 더 그랬다.

어쨌거나 나는 이곳의 손님 혹은 이방인, 아니 신입생인 것을 가장 많이 느끼는 순간이었다.





내가 아무리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 다녔다 해도, 동요 같은 분위기의 찬양부터 불렀다 해도, 찬양은 특정 장르로 다가온다. 찬양계의 가요인 ccm조차, 나처럼 음악에 문외한인 사람도 딱 들으면 (그게 코드 진행의 문제인지 발성법의 문제인지 모르지만) 가스펠인지 아닌지 구별한다.

그러니까 때로는 그 특별한 느낌 때문에 나 역시 어색하기도 하다는 뜻이다. 미사의 성가도, 일반적인 음악과 다른 데다 처음이니까 당연히 어색한 거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리고 나도 애쓸 거니까 자연히 익숙해지겠지, 하고.


하지만, 교회에 앉아 찬양을 부르노라니, '노래라는 건 영혼에 새겨지는 거구나'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기타나 드럼, 신디를 맡은 청년이나 찬양을 인도하는 청년, 몇 명의 콰이어 모두 다 아마추어 중의 아마추어였다. 그렇지만 그런 건 전혀 상관없었다. 내가 이 노래를 들었던, 혹은 불렀던 내 지난 삶의 모든 순간들이, 그때의 내 마음이, 하나님과의 사귐이 물씬 떠오르고 내 몸에서 울렸다. 그 모든 기억과 감정을 찬양으로 토해내면서 진정한 나를 만나는 것 같았다.


눈물을 몰래 닦아내느라 무람했다. 그때, 정말로, 이쪽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이것은 내가 놓칠 수 없는, 놓치면 안 되는 것이었다.

마음이 정말로 복잡해졌다.





하지만 이런 고민은 매우 순식간에, 그리고 싱겁게 마무리되었다.


찬양 시간이 끝나고, 목사님이 초대한 여러 다른 교회의 목사님 혹은 교단의 높은 분들이 기도를 하고 축사를 하고 말씀을 전했다. 뻔한 말을 길게 하고, 당연한 말을 과장하고, 그 자리에 앉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이야기가 무엇인지 고민한 흔적 없는 쉬운 당위의 말들이 이어졌다. 드러나고 주목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사수하려는 태도에 나는 왜 이렇게 날카로워지는 걸까.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분들과 함께 온 사람들은 대부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고, 때 맞춰 '아멘'을 외쳤고, 웃고 울었다. 그에 반해, 아이들은 그야말로 좀이 쑤셔서 제대로 앉아있지도 못했다. 이 자리를 준비한 스무 명 남짓한 우리 교회의 일꾼들은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었다.

나는 '벌거벗은 임금님'을 보는 것 같았다.


모든 교회가 이렇진 않다. 모든 목사들이 이렇진 않다. 이 교회도 늘 이런 모습만 있는 건 아니다. 당연히.

하지만 이런 모습들이 익숙할 정도로는 많다. 그리고 한때 나의 목사님은, 이런 사람들을 부르고 이런 사람들에게 마이크를 쥐어주고 이런 자리를 오늘 같은 날에 만드는 분이다. 역시 나는 여기에서 이리저리 (나의 내면에서, 그리고 교회의 다른 사람과) 부딪칠 수밖에, 괴로워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예배가 끝났다. 이어지는 식사 자리를 마다하고, 웃는 얼굴로 인사한 뒤 서둘러 돌아왔다.





가길 잘했다고, 일기에 적었다.

교회를 떠나면서 어느 정도는 확실히 의사 표명을 했지만(그전까지 갑자기 사라지듯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안타까웠다), 어쨌거나 일방적인 인사였기 때문에, 이들과의 헤어짐은 못내 미안했고 무례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다시 (그것도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만나서, 우리는 (다른 곳에 있어도, 매주 만나지 않아도) 반가워하고 웃으며 인사할 수 있는 관계라는 걸 확인한 것 같았다. 그렇지, 우리는 한때 동고동락하며 함께 많은 일을 겪었던 (가족까진 아니어도) 친척 같은 사이니까. 멀어진다고 영영 단절되는 것도, 척지는 것도 아니다.

(지난 크리스마스 이브에도, 교회 사람들이 새벽송을 위해 우리 집에도 찾아왔다. 차와 간식을 대접하고 이야기를 나누는데 참 좋았다)


그리고 개종에 대한 내 마음이 확고해지는 시간이었다. 물론 성지순례 이후로 내 마음은 더 이상 갈팡질팡하지 않았지만("멍하고 뚱하게 성지순례"), 한때 사랑했던 존재를 등지고서 하는 결정과 마주하고서 하는 결정은 다른 것이다. 나는 내가 이 교회를, 교회 일반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 안에서 무엇으로 행복했는지, 그리고 그럼에도 지금은 왜 떠나고 싶은지, 무엇과 함께할 수 없는지 확실히 정리할 수 있었다.




마치 모국을 떠나 살 때 다른 그 어떤 문화보다도 음식은 떨어내지 못하는 것처럼, 음악도 그런 종류의 것이라고 나는 알게 됐다. 어떤 것은 그런 것이구나. 어릴 때 받아들인 것은, 그게 좋고 싫고 맞고 안 맞고를 떠나, 영혼에 새겨지는구나.


모국어로만 표현할 수 있는 생각과 감정이 있다. 다른 언어로는 택도 없는. 성가로는 아무래도, 내가 교회에 다니며 불렀던 찬송가나 ccm과 같이, 하느님을 향한 내 마음, 내 영혼의 언어를 표현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찬양을 듣는다. 차에서, 집에서. 찬양을 부른다. 혼자서라도.

이것은 내 것이다. 놓아버릴 이유가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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