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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비령 Sep 10. 2024

현실 자각 타임, 이대로 괜찮은 걸까

사계 중 가을. 

완성미에 가까운 성숙의 계절, 그리고 그 한 가운데 한가위가 있다.


돌싱남, 돌싱녀의 명절은 어떠할까? 많은 분들이 궁금해 하신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이혼과 동시에 명절에 지켜야 할 '의무'나 시댁 찾아뵙고 제사지내기 같은 '의례'들이 사라졌다. 오히려 돌싱이 된 이후로 명절은 적적하고 한가로운, 어쩐지 찜찜한 휴가날이 되어버렸다.


처음에는 명절도 두렵지가 않았었다.
오히려 나를 사랑하고 아껴주는 친정식구들과만 명절을 보낼 수 있다는 사실에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을 만큼 통쾌하고 행복했었다.

그렇지만 한 해, 두 해, 세 해 날이 가고 달이 가고, 시간이 흐를수록,
무언가 마음 깊은 곳에서 '이대로 괜찮은 걸까'라는
근본적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일단, 아이에게 미안했다. 부모가 함께 단란하게 양가를 찾아뵙고 인사드리며 

가족 간의 끈끈함, 유대감, 조상에 대한 예의 등등을 가르쳐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이 집-저 집 아이 홀로 왔다갔다 하면서 

'두 개의 가정'을 갖도록 해야하는 상황이 반갑지 않았다. 


내가 유난인 걸까? 솔직히 그렇다. 


명절이란 가족 간의 화합을 도모해야 하는 날이 아니던가?
언제부터인가 일 년에 몇 번 없어 반가워 마땅해야 할 명절이란 날이, 
누군가에게는 숨고 싶은 날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치뤄내야 할 관문 같은 것이 되고, 
또 누군가에게는 꼭 한 번은 마주쳐야 할 현실 자각 타임이 됐다.



내게 있어 명절은.. (특히 다시 혼자가 된 이후로는)

어릴 적부터 든든한 내 편이었던 가족들, 일가친척들을 만날 수 있는 행복하기만한 시간이라고 여겨왔었다.


2년 전, 코로나 시국이라는 특수한 상황으로 3년이나 반강제적으로 만나지 못했던 아쉬운 시간을 보내어서였는지, 다시 찾아온 명절이 새롭게 느껴지고 조금은 기대를 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막상 마주한 현실은.. 역시나 혼자가 된 나는 집안의 천덕꾸러기구나.
'무언가 미완성된, 누군가에게는 감추고 싶은 새끼 손가락일 수도 있겠구나.' 싶더라.


실상 결혼이든 취업이든 다 내 삶이고 내 선택이라지만 왜 아직도 누군가는 '평범한 길'에서 벗어난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걸까?



난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행복하고, 특별히 다른 선택(재혼이라든가)으로
또 다른 혼란 속에서 헤매이고 싶지 않은데.
오로지 나의 힘으로 명징하게 주체적인 인생을 살고 싶건만.

글쎄, 아직은 인생을 끝까지 다 살아보지 않아서일까?

그래도 어디 내세우기에는 혼자보단 둘이 낫겠지?


아이 셋을 낳고 시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동갑내기의 올케를 바라보며
나의 삶과 그녀의 삶 중 어떤 삶이 바람직하고 가치 있는 삶일까
문득 생각해 보게 된다.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 인생이다. 


하지만 무언가 동정어린 눈길들로 나를 바라보는 시선 속에서

가슴이 답답하고, 마음이 철렁 하는 순간들이 없었다고는 못하겠다.

굳이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괜찮아요.'라고 변명하고 싶지도 않고.



분명한 것은 명절에 오랜만에 마주한 친척들 속에서 행복하기만하지는 않았다는 점.

아직도 여전히, 심지어 가족들 사이에서도

사회적 시선이라는 게 분명히 존재하는구나. 라고 투명한 벽을 느꼈다는 점.


명절은 일 년에 두어 번.

그 중에서 가족 식사 타임은 하루 중 몇 시간에 불과하지만

왠지 내 삶을 평가받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매우 거북스럽고 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시간이었다.


그래. 남을 신경 쓰며 산다는 것은 이토록 피곤한 일이다.

더구나 남이 아닌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걱정을 끼치며 산다는 것은

때로 나 자신을 너무 초라하고 위축시키게 만든다.


내일은 좀더 일찍 일어나 산책이든 조깅이든 힘차게 해봐야겠다.

구겨진 종이처럼 구석에 박혀있을 이유는 없지 않은가?
누가 뭐라든, 내 인생은 소중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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