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녕 Oct 27. 2022

그래서, 나는 오늘도 쓴다.

"어차피 선생님도 몇 년 후면 이런 거 다 안 할 거잖아요."


순간 정적이 흘렀다. 반에서 유난히 모진 말을 많이 내뱉는 시연이의 한 마디에 같은 반 아이들도, 그리고 그 앞에서 이야기를 하던 나도 얼어붙었다. 그때의 나는 중학교 3학년 담임을 하며 반 아이들과의 매일매일을 사진으로 찍어 앨범으로 만들어 두고 있던 때였다. 마침 우리 반 아이들과 내 코드가 맞아 아이들이 꽤 감동을 받아 서로 마음이 통한다고 느끼는 순간이었다. '앞으로도 기회가 된다면 끝까지 내가 만난 아이들에게 이런 걸 해주고 싶다'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가시 돋친 말을 던진 것이다. 괘씸한 마음이 들었지만 내가 당한 무안을 아이에게 되갚아 주겠다는 마음으로 응징하기엔 마음이 약했다. 가뜩이나 반 아이들에게 은근히 미움을 받아 반에서 적응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인 아이였다. 나까지 '앙갚음'을 '교육'이라 포장하여 말을 덧대면 학급에서 영원히 잘 지내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 네 말대로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노력은 해 보려고.(웃음)."


담담한 척 말했지만 꽤 상처를 많이 받았다. 문제는 이런 상처가 10년 전 그날의 에피소드로만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해가 갈수록, 아이들을 지나 보낼수록 여리고 섬세한 마음엔 깊고 깊은 상처가 자리 잡아갔다. 순수한 호의, 있는 그대로를 믿어주는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의심하거나 이용하려는 아이들이 많았다. 물론 착하고 바르며 말을 잘 듣는 아이들도 당연히 있었지만 어찌 된 게 나를 힘들게 하는 아이들에게 더 마음을 뺏겨 버리는 성격이었다. 무시하면 그만이라지만 무시가 되지 않았다. 눈에 들어왔고, 거슬렸고, 마음이 쓰였다. 강하게, 호되게 가르치지 못하는 걸 들키는 순간 내 머리 꼭대기에 올라와 나를 눌러보려는 아이들에게 늘 반쯤은 무시당하며 살아왔다. 나 스스로는 그들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위안했지만 실은 그들의 비웃음이 두려워 피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아직 성장하고 있는 게 아이들이라고 생각하며 '전두엽'이 발달하고 있는 중이라며 그들의 행동을 머리로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에도 끝까지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은 학부모와의 관계였다. 대부분 인정해주고 믿어주었지만 일부는 피를 말리듯 괴롭게 했다. 학급 내에 문제가 생겨 서로의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상황이라 담임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을 때, 스스로 무기력함에 미친 듯이 우울했을 때, 반에 들어가 아이들의 내리 꽂히는 시선을 감당하기 힘들었을 때 나를 불구덩이 속으로 집어넣었던 것은 '담임으로서 뭘 했느냐.', '다른 선생님들은 이렇게 안 한다.'라는 말들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걸려오는 전화, 메시지 등에 지치고 지쳐 퇴사까지 심각하게 생각했었다. 당시 양초 공예를 배우며 자격증을 따 공방을 차릴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용기가 없고, 당장의 월세가 급해 실행하진 못했지만.


할 줄 아는 게 결국 이 일이라 마음이 지옥 같아도, 나를 힘들게 하는 아이를 학급에서, 수업에서 만나야 해도 학교로 출근했다. 날이 갈수록 거칠어지는 아이들, 치밀하게 빈틈을 파고들어 교사를 괴롭히는 학부모, 그리고 미친 듯이 쏟아지는 무의미한 공문의 틈에 허덕이며 약간의 우울이 찾아왔다. 복직 전에도, 복직 후에도 끝없이 몰아치는 우울의 바다를 부표를 잃은 채 헤엄치는 기분이 들었다. 퇴근 버스에서 말없이 눈물을 훔치거나, 집에서 얼얼할 정도로 매운 음식을 먹거나 하면서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노력했다.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것을 매 순간 깨닫는 시절이었다.


그때, 불현듯 시작한 것이 글쓰기였다. 그동안 느꼈던 불안과 고통, 그리고 슬픔 따위를 두서없이 적기 시작했다. 보여줄 글이 아니었으므로 저장만 해두었다. 오롯이 나만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솔직해졌다. 그럴수록 더욱 날 것 그대로의 감정들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분노, 짜증, 증오, 미움 등의 감정을 글로 표현할 때마다 희열을 느꼈다. 때로는 욕을 쓰고, 때로는 다짐을 썼으며, 때로는 주저리주저리 대화를 하듯 무언가를 끄적였다. 다섯 시간이 넘게 걸리는 통근거리의 직장에서 근무하며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글쓰기의 힘이었다. 조금씩 내면이 채워지자 그제야 아이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나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났던 그 녀석들, 매일 밤 울며 자해하던 그 녀석들에게도 마음속에 쌓인 응어리 같은 이야기가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쓰자, 쓰게 하자, 쓰도록 하자.


국어 교사로서 가장 잘할 수 있는 것. 쓰게 하는 것, 자신의 것을 읽게 하는 것, 그리고 느끼게 하는 것. 내 이야기가 담긴 글이 차곡차곡 쌓일 때마다 글쓰기 수업에 대한 욕망도 커져갔다. 기회를 엿보다 우연히 시작한 것이 <이야기 창작반>과 <나도 작가다>다. 수업 중에도 어떻게든 글을 쓰게 하고 싶어 글쓰기 과제를 내주었다. 요란하고 시끄러운 소리가 일제히 사라지고 연필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그 순간이 꽤 큰 위안이 되었다. 나만 그랬던 것이 아니었는지 아이들도 글 쓰는 순간을 좋게 기억해 주었다.


몇몇의 아이들은 내년에도, 후년에도 선생님을 만나고 싶다고 했고, 글쓰기가 좋아졌다고 이야기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아이들의 글은 조금씩 힘이 생기는 듯 보였다. 초등학교 때, 맞춤법과 띄어쓰기가 틀리면 지적받던 압박에서 벗어나 진짜 제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들이 적어낸 삐뚤빼뚤한 글씨 속에 담긴 저마다의 사연은 내게 교사로서 바라보는 '눈'이 얼마나 편협했는지를, 내가 만난 아이가 이 자리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것을 겪어야만 했는지를 생각하게 했다. 분명히 내가 본 것은 10줄밖에 되지 않는 이야기였지만 그 안에 글쓴이의 삶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어디 가서 함부로 들을 수 없는, 삶이.


어쩌면, 어쩌면 이게 진짜 의미 있는 국어수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짙어졌다. 단순한 내용을 채우는 학습지 대신, 생각을 적을 수 있는 학습지로 바꾸고, 교과서의 내용을 그대로 외우는 수업에서 삶을 녹여내는 이야기를 담아내는 수업으로 바꾸려고 노력했다. 절반은 성공하고 절반은 실패했지만 나로서는 만족스러운 성과를 거두었다. 죽도록 그만두고 싶을 때, 담임의 무게를 내려놓고 자유로워지고 싶을 때, 교사란 직업 자체에 회의감이 들어 무기력해질 때, 글쓰기 수업을 하며 스스로의 마음을 토닥였다. 내 글을 쓰고, 아이들의 글을 쓰는 순간만큼은 괴로운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며칠을 버틸 수 있는 힘이 생겼다. 또, 내가 썩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게 해주었다.


그렇게 3년을 보내고 있는 지금,

나는 아직도 글을 쓴다.

어떻게든 글 쓰고 싶은 아이들을 모아서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글을 쓴다. 글을 쓰며 내 안을 다지고 다지고 또 다진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며 조금 더 단단하고 행복해지는 나를 꿈꾼다. 더불어 나를 만나 함께 글을 쓰는 아이들을 보며 그들도 나처럼 글쓰기를 통해 조금은 더 강해지기를 바란다.


그것이, 글로 만난 사이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일이라고 믿기에.



이전 10화 [인터뷰] 민서와 지희의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