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을 지켜준 건 너였어.
"당차고 씩씩하며 야무지다!"라는 말을 사람으로 표현한다면 바로 딱 어울릴 아이가 있었다.
특이한 성을 가져 평범한 이름을 더 돋보이게 했던 아이, 항상 밝고 긍정적인 모습만 보여주던 아이, 바로 소윤이다. 2013년, 아직은 어설프지만 뜨거운 열정으로 아이들을 사랑하고 싶던 교직 2년 차 시절, 나는 3학년 1반의 담임으로, 소윤이는 그 반의 학생으로 우리는 처음 만났다.
2012년에 첫 발령을 받아 담임했던 2학년 4반 아이들이 그림처럼 예쁜 아이들이었다면(중간고사, 기말고사 1등을 늘 했고, 반 단합이 잘 되었으며, 아이들이 착해서 내 말을 참 잘 들어주었다.) 13년에 만난 3학년 1반은 여러 모로 정말 힘든 반이었다. 반 아이들은 이미 그룹이 정해져 있었으며 무단결석을 밥 먹듯이 하는 아이가 2명은 기본으로 있었고 사회적인 의사소통을 잘하지 못하고 공격적인 말로, 혹은 상대를 지치게 하는 말로 학급에 어울리지 못하는 아이도 두어 명 있었다.
분명, 12년에 가르친 아이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학급이 바뀌니까 예전과 같지 않았다. 아이들은 이제 갓 2년 차가 된 선생님의 말보다는 권력이 있고, 카리스마가 있고, 자신들을 벌줄 수 있는 선생님들의 말을 더 잘 들었다. 내 앞에서는 반항하다가도 학생부 선생님의 한 마디면 꼬리를 숙였다. 학생부에 다녀온 다음날은 교복도 제대로 입고, 머리도 단정하게 자르고, 지각도 하지 않았다. 믿어주고, 기다려주고, 아껴주고, 이해해 주면 점점 나를 믿고 변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내 교직관을 흔들어버리는 매일매일이 반복됐다.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아이들에게 영향력이 없는 교사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밀려올 때면 우울하기 그지없었다. 담임교사로서 생활지도도 잘 안되는데 설상가상으로 수업도 자신이 없었다. 아이들 앞에서 뭘 가르치고 있는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보내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자괴감이 들었다. 딱히 사명감이 있어 교사가 된 것은 아니었지만 의미 없는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그 해,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왕래가 많진 않았지만 나를 아껴주신 할머니의 죽음은 가뜩이나 타지 생활을 하며 향수병을 앓고 있는 나를 깊은 우울의 늪으로 빠져들게 했다. 뭘 해도 즐겁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자다가 세상이 사라져 버렸으면, 하는 생각들만 들었다.
어려운 형편에 자취방을 구하기 힘들어 고시원에 살던 시절이었다. 침대 하나, 책상 하나만 겨우 놓을 수 있는 좁디좁은 공간에서 할머니를 떠나보내던 마지막 날을 곱씹고 곱씹으며 매일을 울며 보냈다. 학교엔 나를 힘들게 하는 아이들만 있었고, 밤 10시가 넘어 퇴근한 집엔 아무도 없었다. 옆방에 소리가 들릴까 싶어 한 밤중엔 전화통화도 마음껏 할 수 없는 지옥 같은 생활이었다.
소윤이는 그런 내게 활력을 넣어준 아이이다.
아이들이 다 집에 가고 난 후, 오후 4시가 훌쩍 넘은 시간에 일을 하고 있는 내 앞에 앉아(당시 학교는 교과교실제여서 교무실이 없고, 교실에 선생님들의 개인 컴퓨터가 있었다. 초등학교 교실과 같은 구조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이런저런 말을 걸어 주었다.
"선생님, 영화 좋아하세요? 저는 집에 가면 영화 한 두 편은 꼭 봐요."
"선생님, 지금 뭐 하세요?"
"선생님, 지금 사실 일 하는 거 아니고 노는 거죠? 일하는 척하는 거죠?"
딱히 특별할 것도 없는, 하지만 어쩐지 나에게 설렁설렁 장난 거는 것 같은 말을 듣고 그냥 넘어가지 않고 하나씩 꼬박꼬박 답을 해주는 게 이상하게 귀찮지 않고 좋았다.
"응. 나는 영화보단 드라마가 좋더라. 기다리는 건 싫어서 몰아서 봐."
"응? 나 지금 너네 수업자료 만들지."
"아니거든! 지금 열심히 학교 일 하고 있거든?"
이런저런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하다 보면 퇴근 시간은 훌쩍 넘고 해가 뉘엿뉘엿 지곤 했다. 집이 가깝지만 엄마가 걱정하시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괜찮아요. 엄마 지금 하나뿐인 엄마아들놈 와서 저는 안중에도 없을 걸요?" 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군대에 갓 입대한 오빠가 휴가를 나왔다면서 집에 들어가기 싫다고, 최대한 놀다 갈 거라고 으름장을 놓던 소윤이었다.
그렇게 우리들의 소소한 대화는 드문드문, 그렇지만 꾸준히 이어졌다. 어느새 소윤이가 친숙해지고 익숙해진 나는, 가끔 아이들 일로 힘들어질 때면 고민 상담 같은, 하소연 같은 이야기도 슬쩍, 내비치곤 했다.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어떤 존재인지 모르겠다, 내 말을 아이들이 들어주고 있는지 모르겠다, 하고.
그러면 소윤이는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애들 다 선생님 좋아해요. 선생님이 말하는 거 애들이 다 마음으로 알 걸요? 그런데 그걸 지키지 못하는 건, 뭐냐. 우리가 아직 어려서? ㅎㅎ 그런 거 너무 마음에 담지 말아요. 선생님~"
이라며 도리어 나를 위로해 주었다. 상담해 주고 토닥여야 하는 건 난데, 고작 열여섯의 여학생이 다 큰 어른을 달래주곤 했다. 그러면 나는 그 한 마디에 괜히 힘이 나서 스스로 마음을 다지곤 했다. 그래, 나 아이들이 나를 믿어줄 때까지는, 이렇게 내 믿음대로 해보자, 하고. 괜찮아, 잘하고 있어, 하고.
고마운 마음에 편지도 자주 써 주었었다. 소윤아, 선생님이야. 하며 적어 내려간 편지엔 거짓이 있을 수 없었다. 퇴근하면 어둑한 고시원에 달려가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집게벌레에 스트레스를 받는 것보다, 매일 만나서 푸념만 서로 늘어놓다가 결국은 학교 욕만 하다가 끝나는 직장 동료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보다, 소윤이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훨씬, 때로는 무척 의지가 되었으니까.
그래서일까. 소윤이와 방과 후에 시간을 보내며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아이들을 대하는 게 한결 수월해졌다. 여전히 한 녀석은 학교를 나오지 않고, 다른 녀석은 무단 지각, 조퇴를 밥 먹듯이 했으며, 학급 안에서는 갈등이 끊이질 않았고 학급 성적은 늘 밑에서 벗어나질 못했지만 나는 왠지 든든했다. 아무리 어떤 일이 있어도, 나를 믿어주고, 나를 지지해 주는 아이가 있다는 사실은,
매일매일 조금씩 무너지고 있던 나를
일으켜 세워주기에 충분했다. 덕분에 나는 조금씩 힘을 낼 수 있었고, 조금씩 웃을 수 있었으며, 조금씩 할머니의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변한 건 없었으나 변하고 있었다.
이듬해 소윤이는 졸업을 했다. 그리고 소윤이와 함께 나를 좋아해 주던 지윤, 지현, 유하도 모두 내 곁을 떠났다. 3학년 1반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4인방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영원히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마음에, 아쉽고 속상하고 더 잘해주지 못한 게 슬퍼서 졸업식 날 펑펑 울었던 내가 부끄럽게도
난 아직도 소윤이와 연락을 하고 지낸다.
벌써 10년도 넘었는데 녀석은 때마다 내게 안부를 묻는다.
우리 착한, 00 선생님~
어디서 혼자 울고 계시는 건 아니죠~?
하면서 시작되는 메시지는
이제는 더 이상 마음 여린 신규 선생님이 아닌 내게, 괜스레 민망함과 뿌듯함과, 아련함과 행복함을 준다.
몇 년 전 이른 결혼을 하고 이제는 어엿한 엄마가 된 소윤이가 보고 싶다.
결혼 선물로 보낸 커피 머신으로 커피 마시면서
아이는 잘 보고 있는지 궁금하다.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고 싶다.
만나면, 편지 한 통 써서 주고 싶다.
2013년, 그때 나를 잡아 주어서 너무나 고맙다고.
덕분에,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고.
아, 편지보단 아이 내복을 더 좋아하려나?
제자의 아이는 뭐라고 불러야 할지,
좀 고민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