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에서
청춘의 산행
걷는다
높게 걷는다
이 세상을 밟을듯이,
머리아래, 만물을 발밑에 두고 걷는다
꽃의 꽃말을 안다
나무의 생장을 안다
열매의 역할을 안다
이끼의 목과 속을 안다
햇빛의 따스함을
땅의 비옥함을
바람의 형성과 작용을
중력의 무게를 안다
오른다
낮게 오른다
시지프스가 돌덩이를 밀어 올리듯
만사를 무로 환원하며 오른다
3월의 봄 날 어느 남쪽 섬에
차디찬 눈이 한아름 남아있었음을 모른다
매 걸음을 방해하는
돌부리의 울퉁불퉁함을 모른다
장애물에 미끌리며 느끼는 철렁함을 모른다
그 청명했던 호수가 안개바다가 된 이유를
교활한 저 까마귀의 속셈을
나를 힘들게 하거나 두렵게 하는
이 경사의 원천을
결코 정상에 도달할 수 없는 산행이었음을
그럼에도 목적없이 중력에 반하고 있는
내 발걸음의 이유를 모른다
내려온다
높게 내려온다
청운의 꿈도
치기어린 자만도
자연의 웅대함 앞에 버려두고 가볍게,
그렇기에 고고히 내려온다
구름낀 하늘에도 감사할 수 있음을 배웠다
이름 모를 방랑객에게 베푼
친절의 이유를 배웠다
용기내 건네는 인사에 돌아오는
수줍은 미소를 배웠다
초봄에도 남아있는 잔설殘雪의 생명력을
그 하이얌에 맞서는 이끼의 청록,
그 변증법적 종합을
청춘의 값짐을
지금은 선물임을
젊음의 찬란함을
낭만의 매력을
숭고한 사랑의 힘을
무엇보다 우리가 삶을 치열하게
등반해야 하는 이유를 배운다.
높게 걷다
낮게 오르는
역설의 산행
우리네 삶은
가장 낮은 곳을 오르다
가장 높은 곳으로 내려가는
끝없는 시지프스의 반항
제주 무계획 여행 이틀차인 3월 12일
역시 아무 이유도, 계획도 없이 무작정 행동부터 했습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한라산에 갔는데, 갑작스래 기상 악화로 정상에 갈 수 없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한반도의 지붕인 백록담과 천지를 보는 것이 큰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던 저에게는 상당히 아쉬운 소식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무계획(이건 그냥 무지성인듯) 여행객인 저는 ‘설마 3월에도 눈이 있겠어~’ 하는 안일한 생각으로 폴대나 아이젠은 고사하고 등산화조차 신지 않고 추리닝에 후드, 청자켓, 선글라스 하나만 뒤집어쓴 채 산에 올랐습니다. 미친거죠 그냥 ㅋ
초입부터 2키로 정도를 제외하고는 전 구간 제 키 높이만큼 쌓여있는 눈을 밟고 끝없이 올라가야 하는 고행이었습니다. 계속 넘어질 뻔 하고 경사가 가장 높았던 난이도 A구역에서는 생명의 위협도 느꼈습니다. 제가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 라는 독일 낭만주의 작품을 사랑해서 망정이지 사라오름에 힘들게 올라가서 저 예쁜 호수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ㅠ
그런데 그때 저를 일으켜준 건 다름 아닌 ‘사람’이었습니다. 제게 폴대를 빌려준 안내소의 그녀에게도, 터무니없는 부탁(같이 눈 치우는 일 할테니 트레인 타고 내려갈 때 태워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에 기분 나쁘셨을텐데도 저를 걱정하며 선뜻 아이젠을 내어주신 산림청 관계자님께도, 초콜릿을 하나 드리니 두개로 갚으셨던 부녀께도, 나랑 영어로 재밌게 놀아준 프랑스 커플에게도, 훗날 좋은 노무사가 될 것 같다고 응원해주신 어른분들께도, 제가 실없는 인사를 건넬 때마다(마주치는 사람마다 다 한듯ㅋ)밝게 화답해주신 모든 등산객 분들께도, 멀리서도 제 산행과 건강을 응원해주신 여러분에게도 모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