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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작 Dec 07. 2020

깊고 푸른 우물엔 저마다의 비밀이 하나쯤 있습니다

인터뷰 스물일곱

2017년 4월 15일


“저 고민이 있는데요. 들어주실 수 있으세요?”


스물일곱님은 십 대 후반의 학생입니다. 과학을 좋아해서 이과를 선택했다고 하는데, 실은 문과적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래요. 글 쓰는 것도 좋아하고, 영상 찍는 것도 좋아한데요. 하긴 문과 이과 구분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경우도 화가이자 조각가, 발명가, 건축가, 기술자, 해부학자, 식물학자, 도시 건설가, 천문학자, 지리학자, 음악가였죠.

예전엔 한 우물만 파자가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였다면 최근엔 다양한 재능을 모두 살리자가 대세인 것 같습니다. 그만큼 한 우물로만 먹고살기 힘들었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양한 재능을 표현할 수 있는 열린 사회가 되었다는 의미일 거라 생각합니다. 다양한 취미를 가진 꿈 많은 소녀 스물일곱님. 그녀의 이야기가 궁금했습니다.


스물일곱님에게 공통의 질문 6가지를 드렸습니다. 좋아하는 숫자는 12래요. 신기하죠. 1과 2가 아닌 12. 두 자리 숫자를 말하는 사람이 극히 드물기 때문에 이유를 꼭 확인해야 합니다. 1년이 12달이라서 좋고, 스물일곱님의 생일이 든 달이라 좋고, 무엇보다 크리스마스가 있어 좋데요. 흐. 12에 그렇게 많은 의미가 들어갈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좋아하는 이유를 들으니 저도 12가 좋아지네요. 특히 크리스마스요. 크리스마스는 이유도 없이 설레게 해요.

좋아하는 색깔은 연보라색이랍니다. 뭔가 환상적인 느낌이래요. 알 수 없는 미지의 색이고. 우주를 연상시켜서 좋다고 해요. 그러고 보니 우주 사진을 보면 빛을 중심으로 연보라색을 틔다가 점점 짙은 보라색이 변하는 것 같네요. 스물일곱님의 관찰력이 놀라웠어요.

좋아하는 음식은 녹차맛이래요. 녹차맛이 나는 건 다 좋데요. 녹차 아이스크림. 녹차크림빵. 녹차. 등등. 녹차 특유의 비릿하고 쓴맛을 좋아한데요. 달달하면서 씁쓸한 맛을 느끼는 게 좋다고. 순간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투명하리만큼 하얀 피부에 앳된 얼굴의 10대 스물일곱님이 할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10대 20대엔 단 게 좋은 거 아닌가요? 전 단 것 아니면 안 먹었거든요. 그런데 쓴맛이라뇨. 이건 산전수전 다 경험한 인생 9단 할머니에게서나 들을 말이죠. 그런데 스물일곱님 너무나 진지했습니다. 진심이었어요. 하. 10대에도 이런 감성이 나오다니 그녀의 이야기를 더 들어봐야겠습니다.

좋아하는 동물은 여우래요. 하얗고 복슬복슬해서 좋데요. 무엇보다 최근 '오늘부터 신령님.'이라는 웹툰을 보는데 거기 주인공이 여우라고 했어요. 그런 순정만화를 좋아해서 너무 좋데요. 이런 모습을 보면 천상 10대인데 말입니다. 갸웃. 좀처럼 가늠할 수 없는 영혼의 크기를 가진 스물일곱님을 어떻게 그려야 할까요. 고민이었습니다.

좋아하는 식물은 아이리스래요. 동화책에 나온 아이리스를 보고 좋아하게 되었데요. 그러다 불쑥 아이리스 꽃말이 뭔지 아냐고 묻습니다. 모른다고 했더니. "나를 잊지 마세요."라고 가르쳐주었어요. 그러더니 “저 고민이 있는데요. 들어주실 수 있으세요?”라고 물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첫사랑에 빠졌다며 이룰 수 없는 첫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했어요. 그제야 그녀가 제 앞에 앉은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그제야 그녀의 눈이 깊고 슬픈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그제야 그녀가 쓴 맛을 좋아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스물일곱님의 모습이 그려지시나요? 제가 발견한 스물일곱님의 모습은 순정만화를 좋아하는, 아직까진 책으로 연애를 배우는, 순백의 10대였습니다. 환상적인 미지의 세계를 꿈꾸는 꿈 많은 보랏빛 10대였습니다. 그래서 뜨거운 열병 같은 첫사랑의 아픔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훈수를 둘 수 없었습니다.

그저 조용히 마음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라고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끝이 이별이든. 사랑이든. 미래를 미리 재단해 자신의 마음을 자르는 건 10대에게 해줄 이야기가 아니니까요. 자신이 품을 수 있는 사랑의 크기를 아는 것도 10대가 감당해야 하는 몫이라고 생각했어요. 대신 자신의 자리는 지켜야 한다고 했어요. 그게 무슨 뜻인지 스물일곱님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스물일곱님은 답을 듣고 싶었던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었던 걸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가벼워지니까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고 싶은 대나무밭이 필요했을지도 모르죠. 대나무밭이 필요하신 분에겐 기꺼이 대나무밭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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