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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우 Nov 08. 2021

낙엽, 환생할 수 없는 그리움에 대하여

오팔 이야기

가을이 깊어갑니다.


 며칠 날씨가 쌀쌀해지더니 오늘은 가을비가 내렸습니다. 점심을 먹으러 나온 거리에는 비에 떨어진 낙엽들이 천지입니다.

걷을 때마다 뽀독뽀독 발 밑으로 은행잎이며 단풍잎들이 앓는 소리를 냅니다.

스산한 기분 때문일까요. 기분 좋은 산책은 아닙니다만 식사도 거르고 거리를 걷습니다.


회사가 있는 양평동 근처는 요즘 재개발사업이 한창입니다. 여기저기 빈집들이 리본으로 둘러져 있고, 공가를 표시하는 경고장이 붙어있습니다.  얼마 만 해도 누군가의 따뜻한 보금자리였던 곳, 지금도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튀어나올 듯한 착각이 듭니다.


살짝 열린 대문 틈으로 집안을 들여다봅니다. 마당에는 깨진 세숫대야와 화분과 유리병, 텃밭에는 수확하지 않고 남은 말라버린 고추도 보입니다. 이제는 누구도 살지 않는 빈집,

곳곳에 여전히 사람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조만간 다른 누군가를 위해 보금자리가 될 곳,

마당 한 편으로 감나무가 서 있습니다. 사람이 없는데도 울긋불긋 낙엽이 곱게 물들었습니다. 낙엽은 잎 가장자리에서부터 물들어 온몸 전체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곱게 물든 낙엽이 오팔을 닮았습니다. 

오팔을 처음 본 것은 호주 맬버른의 프리마켓에서였습니다.


유학 초기 현지인들의 삶을 느껴보려고 찾은 그곳은 마침 가을 단풍이 한창이었습니다. 마켓은 현지인들로 활기에 넘쳤습니다.

간단한 일상용품부터 골동품까지 정말 흥미로운 볼거리가 많았습니다. 이것저것을 둘러보던 중 시장 한쪽에 보석이 놓인 좌판을 발견했습니다. 벨뱃 천 위에 불투명 우유 바탕에 무지개가 소금처럼 뿌려진 보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오팔이었습니다.


 호주는 오팔의 최대 생산국이며 가장 질 좋은 오팔 생산지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등 뒤로 해가 지고, 한참 동안 오팔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었습니다. 오팔은 호주의 가을 낙엽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습니다.

                        Photo by Pixabay


 한참이 지나서 오팔을 자세히 알게 된 것은 미국에서 보석 공부를 할 때였습니다.


오팔은 땅속 깊이 퇴적된 모래 속에 있던 규소 침전물이 오랜 시간 열과 압력을 받아 암석에 스며들 때 만들어진 보석입니다.  즉 규소 성분이 만든 단백석 결정이 오팔입니다. 무색이나 유색 바탕 위에 다양한 색상이 있습니다. 오팔은 빛의 각도에 따라 색깔이 변합니다. 이러한 화려한 변색 효과  때문에 보석의 여왕(The Queen of Gemstones)이라 부릅니다. 오팔은 정말 가을   낙엽을 닮은 보석이어서 10월의 탄생석이기도 합니다.


화이트 오팔은 하얀 바탕에 은은한 무지개 빛을 띠는 가장 흔한 오팔입니다. 호주에서 주로 산출되며 블랙 오팔에 비해 유색이 적어 화려하지 않습니다.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인 오팔입니다.


블랙 오팔은 가장 아름답고 비싸서 오팔의 왕이라 불립니다. 짙은 청색이나 검은색 바탕에 붉은색, 노란색, 주황색 등의 붉은 계열의 색상이 나타납니다. 강렬하고 밝은 빛을 띠어 매우 아름답고 화려합니다.  블랙 오팔은 빛의 투영 각도에 따라 다양하게 색이 변하는 변색 효과(Play of Color)를 갖고 있습니다.


호주의 광물학자들은 오팔의 변색 효과는 내부에 규칙적으로 쌓인 구형 입자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작은 공들의 크기에 따라 빛의 파장이 달라지고, 공 사이로 빛이 산란하면서 다양한 색의 변화가 생깁니다. 블랙 오팔은 호주의 ‘ 라이트닝 리지' 지역에서만 채굴됩니다.


파이어 오팔은 반투명 바탕 위에 밝은 붉은색이나 짙은 주황색을 띱니다. 마치 태양처럼 밝게 빛난다 해서 작은 태양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파이어 오팔은 절정에 이른 단풍잎의 붉은색을 연상시킵니다. 상질의 파이어 오팔은 시코에서만 나오며 예로부터 유럽의 귀족들에게 인기가 높았습니다. 가장 유명한 파이어 오팔은 나폴레옹이 그의 왕비 조세핀에게 선물한 '트로이의 화재(The burning of Troy)입니다.  


워터 오팔은 투명하거나 반투명의 바탕 위에 파란 유색이 은은하게 빛나는 오팔입니다. 내포물이 있는 워터 오팔은 블루라군이 펼쳐진 남태평양의 바다같이 보입니다. 신비롭고 시원한 모습에 매우 인기가 높습니다.


변색 효과는 오팔의 가장 중요한 광학적 특징이며 아름다움의 원천입니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이 효과 때문에 오팔을 지상의 것이 아닌 신이 내린 선물이라 여겨 각종 귀금속 장신구로 사용했습니다. 특히 아랍인들은 오팔을 천국에서 떨어진 번개라 하여 가장 중요한 보석으로 생각했습니다.

로마의 사학자 플리니는 오팔에는 루비보다 부드러운 불꽃이, 자수정의 밝은 자주색이, 그리고 에메랄드의 푸른 바다색이 놀라운 조화를 이루며 빛난다고 했습니다. 로마인들은 오팔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겨 음악의 여신에 비유하여 'opalus'라 불렀습니다.


셰익스피어는 십이야에서 '이제 우수에 찬 신이 너를 보호하리라. 그리고 재단사는 너의 옷을 색이 변하는 천으로 만들 것이다. 너의 마음이 오팔과 같으므로'라고 오팔의 변색을 변덕스러운 마음에 비유하였습니다.

이렇게 오팔은 화려한 색상으로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변덕스럽고 진실하지 못한 불길한 보석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너무 아름다운 것은 질투의 대상이 되기도 하니까요. 일부 질투에도 불구하고 모든 보석 중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색상을 갖고 있는 보석은 단연코 오팔입니다.


자연이 물 바람 온도를 버무려 거침없이 그려낸 액션페인팅, 그것은 오팔입니다.

                         Photo by Pixabay


공가를 지나 거리를 걷습니다.


비바람이 한차례 몰아칩니다. 단풍잎 하나 떨어져 얼굴에 내려앉습니다. 물기를 머금어 축축해진 으로 물방울이 떨어집니다. 단풍잎을 떼어 버릴까 하다가 멈춥니다.


길바닥에는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낙엽들이 주검처럼 떨어져 있었습니다. 얼굴에 떨어졌던 단풍잎을 가만히 들여다보았습니다. 아스팔트 위에 떨어지면 어디로 돌아가지? 순간 자기에게 돌아갈 수 없는 녀석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썩어도 자신에게 돌아가지 못하는 이 도시의 낙엽 모두가 불쌍해집니다. 환생하지 못하는 슬픈 운명.


단풍잎을 호주머니에 넣었습니다. 손끝으로 그녀의 심장을 어루만져봅니다. 막 틔운 봉오리에 깃들던 봄 햇살, 눈부시게 환했던 뜨거운 여름의 향기, 마지막 시간을 함께 했던 가을의 숨소리가 느껴집니다.


시간이 지나면 나도 낙엽으로 질까요?

모든 기억은 색으로 남아 붉은 낙엽으로 남을까요?

누군가 자기로 돌아가지 못한 나를 들어 기억해줄까요?

환생하지 못한 그리움은 그렇게 누군가의 낙엽이 될까요?


외출에서 돌아와 호주머니 속 작은 을 만져봅니다.

불꽃처럼 살았던 짧은 생. 온몸을 태워 만든 붉은 한 잎이, 오팔이 되어 빛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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