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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지혜 Jan 14. 2019

환자는 환자답게

수술 후 6일째부터 몸의 움직임이 좋아졌다. 비록 거북이처럼 느렸고, 겨드랑이에 꽂혀 있는 두 개의 배액관 (a.k.a 피통) 바늘이 가끔 칼로 살을 도려내듯 너무나 아팠지만 나름의 움직이는 요령이 생겼다. 이날부터 보호자가 없었다. 엄마는 코골이 사건 이후로 세종으로 내려간 뒤였고, 남편도 휴가를 마치고 회사에 복귀해야 했기 때문에 혼자 괜찮겠냐며 걱정을 많이 했다. 괜찮다고 말했다. 씩씩하게 혼자 잘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사실 정말 오랜만에 몸 컨디션이 좋았다. 매일 통증에 짓눌려 있던 환자가 아닌 예전의 에너지 가득한 심지혜 씨가 고개를 빼꼼 들었다. 내 안에서 어떤 삶의 열정 같은 것이 솟아났다. 아침부터 노트북을 켜고 입원 당일부터 수술 다음 날까지의 이야기를 브런치에 쏟아냈다. ‘어라? 힘들지 않다!’ 내친김에 간호사님에게 진통제도 그만 맞겠다고 말씀드렸다. 진통제와 수액을 빼면 내 몸을 옥죄는 덜그럭거리는 장치 하나를 더 덜어낼 수 있고 그만큼 난 더 자유로워지게 된다. 간호사님이 괜찮겠냐고 거듭 물었지만 쏘 쿨하게 “걱정 마세요~”라고 답하며 웃었다.    


컨디션을 더 회복하고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병문안은 다 한 주 미뤄둔 상태였는데, 문득 자신감이 생겼다. 제일 보고 싶었던 친구에게 연락했다. 그녀가 오는 시간에 맞춰 병원 본관 1층까지 혼자 마중 나가는 모험을 감행했다. 미로 같은 큰 병원, 수많은 사람 속을 느릿느릿 걸어가며 혹시라도 부딪힐까 살짝 불안했다. 게다가 난 굉장한 방향치라서 그녀를 데리고도 병실까지 한참을 또 헤매야 했다. 열이 나고 어지러웠다. 내 몸 상태를 알 리가 없었던 그녀는 잠깐만 앉았다가 가자며 연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다행히 그녀 눈에서 눈물이 나기 전에 병실에 도착했다. 누워서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모른다. 너무 신이 났다! 차가운 병실이 아닌, 늘 함께 수다를 떨던 따뜻한 카페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고 그녀를 보내고 나니, 원래의 내 일상에 대한 그리움이 더 커졌던 것 같다.    

 

저녁 약을 먹고 밤 주사를 맞고, 자야 하는 시간인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늦은 밤에 노트북을 열고 넷플릭스를 켰다. 손꼽아 아껴두었던 내 최애 영드 <블랙 미러>의 새로운 시즌인 <벤더 스내치>를 봤다. 디지털 광고 캠페인에서 한때 꽤나 유행했던 인터렉티브 무비 형식을 영화에 대입시켜 풀어낸 수작이었다. 주요 장면마다 제공되는 선택지가 있고, 실제 영화를 관람하는 유저의 선택에 따라 스토리가 모두 다르게 전개된다. 경우의 수만 놓고 봐도 꽤 다양한 시퀀스들이 펼쳐지고 공식 엔딩만 아홉 개에 이른다고 한다. 하나의 엔딩에서 멈췄어야 했는데…… 이 열정 충만한 환자는 그 모든 시퀀스와 결말을 다 보겠답시고 새벽 1시를 넘겨가며 깜깜한 병실에서 그걸 다 몰아서 봤다.


내 잘못이었다. 난 평소의 내가 아니었다. 큰 수술을 한 지 이제 일주일도 안 된 환자였다. 아침부터 지나친 열정과 신남으로 인해 무리한 것이 확실했다. 내 몸을 혹사시킨 죄였다. 밤새 아팠다. 어지럽고 울렁거리고 통증도 심해졌다. 내 힘으로 다시 일어날 수도 없었다. 혈관 자가 진통제를 끊지 말걸…… 후회가 되었다. 진통 주사와 약의 힘으로 버티면서 끙끙대며 밤을 보냈다. 다음날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님한테도 한 소리를 들었다. (훌쩍)     


반성한다. 내 마음의 소리보다는 내 몸의 소리를 우선으로 따라야겠다. 환자는 환자답게! 이것이 내가 그날 뼈 때리며 배운 교훈이다. 당분간은 삶의 열정과 신남은 잘 넣어두고 우선은 절/대/안/정을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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