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여름은 짙은 녹음을 만들고
연일 뿜어대는 열기에 기온은 35도, 체감은 39도 어디쯤.
여기는 위도 35도 부근의 동아시아 대한민국 부산 어느 아파트 방안이지, 적도 어디쯤에 있는 작은 도시가 분명 아니다. 강풍으로 돌아가는 선풍기를 얼굴에 바짝 붙여놓고 소파에 앉아 휴대폰으로 열심히 영어 공부를 한다. 10분도 안되어 머리 속은 방안 열기가 만들어낸 수증기로 몽롱해진다. 더위에 반쯤 항복한 나는 이번에는 소파에 엎드려 책을 읽는다. 하지만 어느새 머리를 쿠션에 처박고는 낮잠에 빠져든다. 그렇게 30여분 자다 깨면 진득한 땀이 내 몸을 감싸고 있다.
[총, 균, 쇠]의 작가 '제래드 다이아몬드'는 대륙마다 문명의 발달 정도가 달랐던 것이 그 대륙에 사는 동물의 가축화 가능성과 그로 인한 전염병에 대한 내성 여부 때문이라고 했던가? 그는 중요한 한 가지를 빠뜨렸다. 바로 더위다. 더위는 인간을 무력하게 만들어 정신과 신체에 있어서 최소한의 움직임만을 허용하는 것 같다. 그래서 더위를 심하게 겪지 않았던 북반구 대륙의 문명이 적도 주변 대륙의 문명 보다 앞서 나갈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게 한 깊고 길었던 이번 여름도 결국 끝을 향해 가고 있다.
오늘도 나는 오후 6시가 되자 산책을 하기 위해 밖을 나갔다. 그런데 웬일인가? 실내의 후덥지근함과 달리 바깥은 선선한 바람이 내 얼굴을 가볍게 훑고 지나간다.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보니 언제부터 이랬지? 길 가 나무의 나뭇잎들이 나뭇가지마다 빽빽이 피어나 멋진 잎사귀 터널을 만들고 있었다. 산책을 나갈 때마다 잎사귀 사이로 반짝거리던 햇빛이 그렇게 거추장스러웠는데, 어느새 짙은 녹음에 햇볕은 힘을 잃고 그 자리를 차지한 힘찬 나뭇잎의 흔들림이 반가운 바람이 되어 나를 반긴다.
이번 여름은 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