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때는 각종 글짓기 대회 참가가 숙제인 때가 있었다. 스승의 날 편지글 쓰기, 통일 글짓기, 표어, 시, 시조 등 다양했다. 특히 과학의 날, 한글의 날, 호국 보훈의 달에는 대회가 더 많았던 기억이 있다. 그중 잘 쓴 작품을 반 대표로 뽑아서 학교대회, 지역 대회에 나가곤 했었다.
참가했던 대회 중에서는 '과학 상상 글짓기'대회가 기억난다.
국어 선생님이 과학 상상 글짓기 대회를 설명해 주셨다. 상상 글짓기는 허구의 이야기, 즉 소설을 쓰는 대회다. 원고지 분량이 20매 이상이었다. 지금이야 원고지 20매는 몇 분 쓰다 보면 후딱 넘길 수 있는 양이지만 그땐 달랐다. 일단 원고지 사용법이 익숙하지 않았다. 원고지 20매는 겨우 겨우 채울 수 있는 어마어마하게 광활하게 느껴져 졌다.
그런데 선생님은 다른 학교에서 겪었던 경험을 말씀해 주셨다.
"원고지 20매 이상이라는 건 분량은 더 넘어도 된다는 말이야. 어떤 학생은 원고지 40매를 써서 상을 받았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면 넘겨서 써도 좋아. 20 매라고 딱 20매 맞추지 않아도 괜찮아."
20매를 넘게 쓴다고?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고, 도전해 보지 않았다. 늘 대회 분량에 맞춰서 작품을 냈다. 10매 이상이라면 10매에서 12매 사이를 제출했다. 획기적으로 20매, 30매, 40매를 써 볼 생각을 안 했다. 주변에 그렇게 쓰는 사람이 없어서 생가도 못한 방식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나도 그렇게 해 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맑게 웃으시며 '너희 도 할 수 있어'라는 자신감을 주신 선생님 때문이리라. 하지만 두려웠다. 원고지 40매는 미지의 대륙이었다. 어떻게 가야 하는지, 그 많은 원고지 칸을 무슨 수로 채워야 하는지 아득했다.
나는 고민 끝에 개미가 과학 기술로 홍수를 막아내는 소설을 떠올랐다. 당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를 재밌게 읽고 있던 터라 개미에 관해 많은 정보를 알고 있었다. 마치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만끽하며 작품 구상에 들어갔다
구상이 어느 정도 끝났다. 그런데 40매를 써 본 경험이 없다 보니 이야기 분배가 쉽지 않았다. 처음-중간-끝을 정해놓고 원고지를 나눠서 집필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계획일 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라 시행착오가 많았다. 처음에는 주절주절 적다가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아 찢어 버렸다. 애써 한 장을 채워가는데 한 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처음에서 새 원고지에 처음부터 옮겨 썼다가 나중에게 원고지를 오려서 덧붙이는 방식을 사용했다
그렇게 처음으로 원고지 40매를 써봤다
"이게 되는구나!"
뿌듯했다. 겨우 원고지 20매를 채우던 내가 40매를 채우고 나니 글 쓰는 근육이 늘어났다. 이제 40매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몸이 기억하게 됐다. 원고지를 한 매를 채울 때 얼마큼의 이야기가 들어가는지. 대회는 얼마나 진행되는지. 대충 집필 시간은 얼마나 걸리고, 손이 얼마나 아픈지도 알게 됐다.
그 작품은 우리 반 대표 작품으로 뽑혀서 학교장 상을 받고 시 대회까지 나갔던 기억이 있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공모전 인생이 시작되었다. 처음 써본 소설 형식의 글에 매력을 느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주로 동시, 시조 등의 대회를 나갔다. 산문 형식의 글은 주로 일기를 썼었다. 누군가 내 글을 읽어주는 게 좋아서 일기 형식을 빌려 상상 일기를 써서 책상 서랍에 일부러 놓고 온 적도 있었다. 친구들은 내 일기를 읽는 게 재밌다고 했었다. 생각해 보면 최초의 독자들은 내 초등학교 친구들이었고, 최초의 작품은 상상 일기였다.
그리고 제대로 된 소설을 써본 것이 바로 이 과학 상상 글짓기다. 그때부터 원고지 분량에 대한 겁이 사라졌다. 20매를 두 번 쓰면 40매, 40매를 두 번 쓰면 80 매라는 계산을 할 수 있게 됐다. 쓸수록 능숙하고 노련해졌다. 원고지 사용법도 익숙해졌다.
공모전에 참가해 상을 받은 것도 좋았지만 원고지를 분량을 늘려가며 얻은 자신감이 더 큰 성과였다.
문예창작학과에 재학 중일 때도 이런 경험이 있었다. 지금은 드라마 1회 분량, 시나리오 1편 분량이 익숙하지만 당시에는 생소했다. 그래서 2학년부터 매 학기마다 있는 시나리오 작법 수업이 문제였다. 희곡, 시나리오, 드라마 극본, 게임 시나리오 등 본인이 쓰고 싶은 작품을 1편 써서 함께 리딩 하는 수업이었다. 2학년 1학기부터 4학년 2학기까지 매번 그 수업을 들었다.
2학년 1학기 때는 A4용지 5매에서 10매를 겨우 썼다. 발표날 임박해서 겨우 겨우 섰다. 시, 소설에 익숙했던 우리는 형식의 벽에 부딪혔다. 그래도 썼다. 학점이 달려 있으니까. 여름방학이 지나고 누군가 20페이지를 써왔다.
'어, 나도 저만큼은 써야겠는데?'
나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매수가 늘어났다. 3학년이 되니 30페이지를 넘는 친구가 나타났다. 누군가는 짧은 시나리오 분량에 도달했다. 서로에게 자극을 주며 성장했다. 점차 분량에 대한 감각도 생기고, 이야기를 운영하는 실력도 늘었다. 그렇게 우리는 단막 드라마 1편, 시나리오 1편 분량을 배워갔다.
누구나 처음부터 글을 잘 쓰지 못한다.
글쓰기의 분량은 배우고 익혀야 늘어나는 기술이다. 기술은 수련하면 할수록 능숙해지기 마련이다. 영감이 떠오를 때까지, 좋은 소재를 찾을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다면 원고지 근육을 키울 수 없다. 기초 체력이 부족하면 정작 글을 써야 할 때 체력이 모자라게 된다. 머릿속에는 장편 소설이 들어 있지만, 정작 A4용지 4쪽만 쓰다가 포기하게 된다.
피아니스트가 매일매일 연습하는 것처럼 우리도 연습해야 한다. 블로그에 꾸준히 글을 쓰고, 일기는 쓰는 것도 당연히 도움이 된다. 소설가, 드라마 작가가 되고 싶다면 좋아하는 작품을 필사해 보는 것도 추천한다. 필사가 도움이 된다, 안 된다 말이 많다. 하지만 글 쓰는 근육을 키우고, 해당 장르의 분량을 익히기 위해서는 한 번 정도 해보는 것도 좋다.
웹소설의 경우 매일매일 쓴 5000자 소설이 모여 소설책 1권, 2권을 채우게 된다. 웹소설 연재할 때는 하루하루 5천 자, 1만 자를 채우기에 바빴다. 완결하고 보니 하루하루 쓰지 않았다면 이 많은 분량을 쓸 수 있었을까? 스스로도 놀라곤 한다.
요즘은 웹소설 신인작가도 회원가입 후 무료 연재에 올릴 수 있다. 비공개로 설정하면 나 혼자만 볼 수도 있다. 그렇게 잔근육을 키우다 보면 많은 분량도 쓸 수 있다.
그러니까 쓰자.
끝까지 쓰면 일단 작품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