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어져도 잘 쓰는 작가는 누군가 알아본다
동덕여대 문예창작학과 수업은 재밌었다. 창작 이론, 문학사 이론, 미학 이론뿐만 아니라 시 창작, 소설 창작, 극작법이 매 학기 열렸다. 문제는 학생수가 많지 않은 학과라는 점이다. 한 과목이 폐지되면 다시 개설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시 전공이라고 시만 들을 수 없고, 소설 전공이라고 소설만 들을 수 없다. 누가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분위기였다.
다 들어야 해.
정말 피치 못할 사정이 없다면 모든 학생이 시, 소설, 극작을 수강했다. 창작 수업이 대부분이라 매 학기 시를 짓고, 소설을 쓰고, 극작을 하기 위해 머리를 쥐어짰다. 물론 시 전공생들이 시를 더 잘 쓴다. 소설 전공생들이 소설을 그럴싸하게 쓴다.
그런데 모두 헤매는 과목이 있었으니 극작법이었다.
벌써 20년도 넘은 이야기라 참 부끄럽지만 그땐 드라마 대본을 보기도 쉽지 않았다. 대본집이 지금처럼 흔하지도 않았고, 드라마 작가가 되고 싶은 작가들이 모인 인터넷 커뮤니티도 없었다. 서울 예대 등에는 극작과가 있으니 드라마 작가에 관심 있는 학생들은 그곳으로 진학했을 것이고, 시나리오 작가가 되고 싶은 학생들은 영화과에 진학했을 것이다. 그리고 다수의 학생들의 시나 소설 공모전은 참가해 봤지만 극작 공모전은 생소했다.
그런데 수업을 들어보니 재밌었다. 2학년부터 고등학교 때 배운 기본 지식으로 지문과 대사를 쓰면서 수업 과제를 해나갔다. 작법책도 많지 않은 시절이었다. 영화보단 드라마를 더 좋아했던 터라 수업 시간에 TV드라마 단막극을 쓰기 시작했다. 4학년이 되자 제법 대본의 형식을 갖춘 작품이 됐다.
나는 수업시간에 쓴 작품을 KBS의 단막극 극본 공모에 냈다. 제목은 <여보, 당신 애와 내 애가 우리 애를 기다려요>였다. 겨울이 되면 신춘문예를 냈고, 여름이면 드라마 극본 공모에 내던 시절이었다.
이 작품은 각자 이혼 후 자녀를 데리고 재혼한 어느 가정 이야기다. 하필 아들과 딸이 동갑이라 같은 학교에 가야 했다. 당연히 같은 반이다. 초등학교 5학년이라고 설정했는데, 사춘기가 시작될 나이라 친구들이 같은 집에 사는 둘을 이상한 사이로 오해하면서 일어나는 성장물이었다. 엄마와 성이 다른 딸은 새아빠, 새 동생과 성이 다른 것도 문제였다. 나와 동갑내기 동생이 가족이라는데 왜 성이 달라? 이런 발칙한 질문을 하는 이야기였다.
고등학교 때 얻은 공모전 팁은 '무조건 눈에 띄어야 한다'였기 때문에 제목이 길어도 사용했다. 지금은 모든 드라마 극본 공모가 온라인에서 이뤄지지만 그땐 출력해서 우편으로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휴대폰으로 연락이 왔다. 예심에 통과했으니 원고를 이메일로 송부해 달라는 연락이었다. 너무 신기했다. 수업시간에 쓴 작품이 예심에 통과하다니! 드라마 작가님과 피디님들이 내 작품을 읽었다니! 최종작으로 선정되지 않았지만 학생에게는 큰 원동력이 됐다.
아, 내가 드라마 작가에 소질이 있나?
다음 해에는 다른 작품을 보냈다. 그때 중국에서 어학연수 중이었는데 또 예심에 통과했으니 이메일로 대본을 보내라고 했다. 떨리고 좋았다. 또 최종심에는 오르지 못했다.
이 두 번의 기억이 나를 드라마 작가의 꿈을 꾸도록 이끌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더 열심히 노력해서 드라마 작가로 안착했었어야 했나, 하는 후회도 남는다.
6개월 간의 어학연수를 마치고 돌아와서 한국 작가 협회 교육원 기초반, 연수반을 다녔다. 그리고 지금은 사라졌지만 CK미디어웍스 기획작가로 일했다. 상주 작가는 아니고 프리랜서였다. 할리우드 시스템이라는데 난 잘 모르겠다. 매주 미니시리즈 원작으로 사용할 만화책이나 소설을 검토하고 내가 직접 미니시리즈 기획안을 써가기도 했다. 보조작가로 짧게 일하기도 했고, 회사 작품 모니터도 했었다. 드라마가 만들어지는 현장에 약간 발만 담가봤다.
아, <여보, 당신 애와 내 애가 우리 애를 기다려요> 이 작품은 후에 KBS의 'KBS무대'의 라디오 단막극으로 방송됐다. 제목은 <쌍둥이 남매>로 변경됐다.
그리고 넷플리스 <도시괴담>, 라이프타임 <인어왕자 더 비기닝>을 쓰며 여전히 드라마를 준비하고 있다.
대학시절 이후로도 다양한 극본 공모에 도전하고 있지만 늘 거기까지.
수상하진 못했다.
아쉽지만 더 좋은 기회들을 얻기도 했다. 공모전에 참여하면서 심사했던 드라마 감독님들이 개별적으로 연락을 해주셔서 함께 일하고 있다. 소설 공모전의 경우 떨어졌지만 개별 연락해서 책을 출판한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그러니 기회는 어디든 있다. 꽁꽁 숨어 있으면 아무도 날 찾아주지 않는다. 프리랜서들은 이렇게 공모전을 통해서 인맥을 쌓기도 한다.
단, 작품이 도용될 경우도 간혹 정말 간혹 있으니!
메가 히트 울트라 초초초초초대박이 기대되면 조금 아껴둬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