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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는 여자 Oct 24. 2021

생계를 위한 공모전

나를 키운 건 8 팔의 공모전

대학 때는 편의점 알바 (그때 시급이 1900원, 2100원이었다), 호텔 연회장 알바, 은행 텔레마케터(지금도 TM 전화를 아주 공손하게 받는다, 아웃바운드는 힘들어), 동화책 윤문, 한국갤럽 리서치 요원(밥으로 주는 김밥 한 줄은 정말 맛있었다) 정말 다양하게 했었다. 

스포츠 신문의 대학생 기자, 학보사 기자, 여름 방학 때는 학교에서 뽑은 해외 자원봉사 요원에 뽑혀 키르기스스탄 3주, 필리핀 3주 해외 봉사도 나갔었다. 심지어 중국 사막에 나무 심으러 가는 봉사활동까지 했다. 틈틈이 연애까지 하려니 바빴다. 

거기에 과제를 하고 여름이면 드라마 공모전, 겨울이면 신춘문예 병에 걸려 마라톤에 참가하듯 매년 참가했다. 참 성실했지만 늘 떨어졌다. 

거기에 목돈을 쥐려면 학원 강사를 해야 했다. 초등부 논술, 중학 국어 강사를 주로 했다. 촌에 살아서 늦은 시간까지 일할 수 없었다. 열 시, 열한 시면 막차였으니까. 

이렇게 정신없이 돌아다녀서 대학 전공 교수님은 '네가 무역회사 들어갈 줄 알았다'고 진지하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졸업을 했다.


남들도 취업한다고 하니, 나도 먹고살아야 하니 삶과 타협해 보려고 했다. 

어찌어찌하여 제법 큰 아동 출판사 최종 면접까지 갔다. 

면접관은 "문창과면 계속 글 쓰실 건가요?"

나는 해맑게 웃으며 "네!"라고 말했다. 글을 쓰지 않는 삶은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는 "문창과 출신들은 잘 다니다가 글 쓴다고 그만두더라구요."

그렇게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아니, 그러면 처음부터 문창과를 뽑지 마시던가. 

다른 곳은 IT시대에 걸맞은 전자책 회사였다. 최종 2인에 들었다. 둘 중 한 명이 되는 상황인데 면접관이 물었다. 

"어디까지 승진하고 싶으신가요?"

"예?"

생각지 못한 질문이었다. 당장 취업은 하고 싶지만 그 회사에서 먼 훗날 내 미래까지 그려보지는 않았다. 임기응변으로 넘겨보려고 했지만 과장, 부장, 차장, 이사의 순서도 몰랐다. 

"올라갈 수 있는 한 가장 높이 올라가고 싶습니다."

얼마나 뜬구름 잡는 소리인가. 결국 떨어졌다. 


취업 대신 대학원 진학을 선택했다. 자유기고가, 기획 작가 등을 하며 대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한국콘텐츠진흥원(KOCCA)의 지원사업을 눈여겨보게 되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을 작가를 양성하기 위해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기획 중인 작품을 지원하거나, 작가를 지원했다. 나는 공고가 날 때마다 도전했다. 특히 육아로 사회생활이 힘든 경단녀 시절에 집중적으로 이 제도를 활용했다. 


2021 KOCCA 콘텐츠 IP 사업화 상담회 선정 <마담 타로>

2021 KOCCA 창의인재 동반과정 사업화 선정 <마담 타로>

2017  KOCCA BCWW 드라마 피칭 선정 <불의 전쟁>

2017 KOCCA K-스토리 인 재팬 2017 피칭 <불의 전쟁>

2016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필름마켓 신화창조 프로젝트 피칭 <불의 전쟁>

2015 KOCCA 스토리공모대전 우수상 / 스토리 <불의 전쟁>

2014 KOCCA 스토리작가 양성 사업 / 스토리 <풍수남녀> 

2014 KOCCA 스토리마켓 피칭 선정 / 스토리 <한양살롱>

2013 KOCCA 기획개발 지원작 선정 / 스토리 <한양살롱>

2013 KOCCA 청년인력양성사업 지원작 선정 / SF단편영화 <벙커> 

창의인재양성과정 1기 

창의인재양성과정 0기 

KOCCA 스토리아카데미 3기


각 프로젝트마다 지원 사항은 달랐다. 프로젝트 별로 500만 원, 800만 원, 2000만 원을 받았다. 혹은 월급 100만 원을 받기도 했다. 기획개발 공모전이나 스토리 공모전은 소설, TV 드라마, 영화 등의 완성된 상태가 아니어도 참가할 수 있었다. 이런 사업을 통해 업계 종사자들을 만나고, 인맥을 만들 수도 있었다. 


이렇게 많은 지원사업과 공모전에 선정된 비결이 있다. 

궁금하신가?


바로 '수많은 낙선'이었다. 


수 차례 유사 사업에 지원하면서 기획안 서류에 익숙해지도록 연습했다. 올해 떨어지면 다음 해에는 더 보강해서 지원했다. 때론 '이게 최선이야, 수정 안 해'라며 작년과 똑같은 서류를 지원하기도 했다. 심사위원이 매번 바뀌기 때문에 상관없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지원을 하느냐 마느냐다. 


본업을 위한 공모전의 혜택은 생계에 도움이 되는 '상금'도 있지만 작가의 자존감을 세워준다. 


신춘문예에 당선되는 사람만 작가인가? 

책을 출간한 사람이 작가인가? 


작가는 자격증이 없다. 소속된 기관도 없다. 신인 때는 '내가 작가다'라는 마음을 굳게 먹지만 '작품 뭐 쓰셨어요?'라는 말에 늘 움츠려 들었다. 작품이 없으면 작가가 아닌가? 그래, 아직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그럴 때 공모전이 자신감을 줬다. 종종 산후 우울증도 공모전으로 이겨냈다고 말하곤 했다. 


주로 한국콘텐츠진흥원 사업에 도전했던 이유는 완성화 되지 않은 작품들에게도 기회를 줬기 때문이다. 석박사 과정을 하면서, 임신과 출산까지 하니 육체적으로 쉽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글쓰기를 놓으면 언제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주변에서도 육아를 하면서 일을 병행하길 권하는 선배들이 많았다. 아이를 낳으러, 육아를 하러 잠시 떠났다가 돌아오지 못한 여성 작가들이 많다는 이유였다. 그래서 1년 이내의 짧은 프로젝트가 많은 한국콘텐츠진흥원 사업에 주로 지원하게 됐다. 


공모전은 누가 하라고 시킨 일도 아니다. 하지만 공모전 공고가 게시되면 마음이 바빠진다. 일정을 조율하고, 작업을 계획하고, 기획서를 쓴다. 그동한 작업했던 파일들을 열어 보면서 '오, 이런 게 있었지', '이만큼이나 써 놨었네?', '뭐야, 페이지가 이것 밖에 안 됐었나?' 툴툴거리며 새로운 공모전 폴더를 만든다. 나중에 알았지만 폴더를 만들고, 빈 파일을 준비해 놓는 것이 하루 이틀의 일정을 앞당긴다는 것을 깨달았다. 새로운 파일 생성은 새로운 마음가짐이었다. 


생계를 위해, 꿈을 놓지 않기 위해 시작한 사업화 공모전들 덕분에 계속 작가 생활을 하고 있다. 수년간 이곳의 지원사업을 하면서 기획안 쓰기 실력이 늘었다. 그리고 동료 작가들과 업계 종사자들을 만나게 됐다. 그리고 지금도 한국콘텐츠 진흥원 지원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사업화 후속 사업도 많다. 미국, 중국, 독일 등 해외 피칭 사업도 있어서 작품만 있다면 누구나 도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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